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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정신과 경제적 풍요 쿠바는 해피엔딩을 꿈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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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호 11면

1 산티아고의 계단 길을 한 소년이 오르고 있다. 계단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쿠바 정승구]

1953년 7월 26일 새벽,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반정부 무장단체 140여 명은 산티아고(Santiago de Cuba)의 몬카다 병영을 공격했다. 이 사건은 쿠바혁명의 시발점이 됐다. 쿠바 제2의 도시인 산티아고는 카스트로의 고향이자 몬카다 병영 습격 같은 상징적인 사건 덕분에 ‘혁명의 요람’이라고 불린다. 그곳에서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미국이 ‘영구 임대’해 오늘날까지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는 관타나모가 육안으로 보인다.

쿠바에서 본 쿠바의 미래 <10·끝>

59년 일어난 쿠바혁명은 단순한 정치권력의 변동이 아니었다. 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의 총체적 혁명이었다. 모든 쿠바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린 쿠바혁명은 제3세계와 유럽은 물론 아시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세계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건이다.

한때 뜨거운 논란이 됐던 쟁점은, 혁명 이전의 쿠바가 피델과 그의 신봉자들의 주장처럼 절망적인 사회였는지 아니면 부작용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경제발전이 이뤄지고 있는 체제였는지에 대한 것이다.

혁명 이전의 쿠바에 부(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 쿠바는 아르헨티나와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부국이었다. 57년 쿠바에는 1000명당 45대꼴로 TV가 있었고, 이는 당시 모나코·미국·캐나다·영국에 이어 세계 다섯 번째였다. 바티스타 정권하에서 사회경제적 발전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산업 기반이나 제조생산업이 구축된 발전은 아니었다. 미국 마피아와 결탁한 정권에 그런 경제학적 안목은 없었다. 역사적으로 패망하는 지배 집단의 특징은 도덕적 타락보다 무능함이라는 것을 바티스타 정권은 입증했다. 얼마나 한심했으면, 국가권력과 체제를 열 몇 명의 청년들에게 고스란히 빼앗긴단 말인가.

50년대 쿠바의 가장 큰 문제는 빈부 격차로 인한 불평등이었다. 90만 명 정도의 부유한 상류층 쿠바인들이 나라 전체 소득의 43% 이상을 차지하며, 내키면 마이애미로 쇼핑 갈 정도의 호화로운 삶을 즐겼다. 그들 아래로 간신히 생계를 꾸려가는 350만 명이 버티고 있었고, 맨 아래엔 150만 명의 극빈층이 있었다.

2 20일 오전 미국과 쿠바에 각각 대사관이 개설됐다. 아바나의 한 이발소에 양국 국기가 걸려 있는 풍경. [AP=뉴시스]

거대 제국 미국과의 대결이 혁명의 본질
20세기 초부터 쿠바는 미국 경제에 실질적으로 통합되고 종속돼 있었기에 쿠바인들이 구매하는 상품들은 미국 본토에서 공수된 수입품이었다. 그래서 쿠바의 생활비는 미국과 비슷하거나 더 높았다.

하지만 임금은 훨씬 낮았고, 미국 시민들처럼 사회복지 혜택이나 사회적 안전망을 누리지는 못했다. 민심은 새로운 질서를 원했고, 혁명의 기운이 감돌았다. 여기에 도화선이 된 사건이 바로 몬카다 병영 습격이었다. 오늘날 쿠바를 만든 근간이 쿠바혁명이라면, 쿠바혁명의 본질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과 쿠바가 벌인 기나긴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쿠바 국기는 한눈에 봐도 미국 텍사스 주기인 론스타(Lone Star)와 흡사하다. 쿠바기가 처음 도입된 1848년은 텍사스 공화국이 이미 미국연방에 병합된 이후다. 쿠바의 국기를 볼 때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미국의 또 하나의 별, 즉 또 하나의 주(州)가 되고 싶어했던 일부 쿠바인의 바람이 반영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쿠바인들은 역사적으로 애증 관계에 있는 미국을 어떻게 볼까. 정부와 국가를, 또 국가와 국민을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아는 현명한 쿠바인들은 미국에 대한 적대심이나 증오심이 없다. 냉전시대에도 두 정부의 강경한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예술·스포츠·학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국 간의 문화적 연대가 지속돼 왔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정치에서도 잘 드러난다. 반세기 넘게 미국이라는 골리앗과 싸워온 피델은 지금도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미국의 다양한 진보 세력들로부터 지지받는 거물이다. 지난 몇십 년간 피델은 미국의 구조적 모순과 도덕적 문제를 제기한 ‘재야 정치인’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2016년 미국 대선에 출마한 공화당의 주요 후보 마코 루비오와 테드 크루즈가 쿠바계라는 사실 역시 두 나라의 묘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지난 수십 년간 쿠바계 미국인들로부터 집중적인 로비를 받아 정책적 인질이나 다름없는 공화당의 강경 세력은 미국과 쿠바의 수교를 반대한다. 미국과 시장경제를 맹신하며 추종하는 많은 이들 역시 오늘날 쿠바의 경제 상황을 지적하면서, 쿠바혁명을 평가절하하거나 조롱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 강한 것이 이기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노예’들의 상상력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외국 투자자 돕는 ‘중개상’들 큰돈 만져
혁명이 일어나고 반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쿠바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여전히 경제다. 쿠바에는 특히 아바나에서는 의외로 ‘부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아바나에서 신형 BMW를 타고 다니는 젊은 쿠바인들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중 일부는 교통경찰에게 거수경례까지 받았다. 그들은 쿠바 정부가 망명하지 못하도록 편법으로 수많은 특혜를 줘가며 회유한 유명 문화예술인이거나 정부 고위층의 주변 인물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암암리에 알고 있는 대다수의 인민들은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런 특권층과 무관하게 지난 몇 년간 이뤄진 점차적인 개방정책으로 쿠바에서는 ‘사업’으로 돈을 번 이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기도 하다. 하비에의 친구인 칼로스는 외국인을 대신해 부동산을 구입해 주는 ‘프런트(testaferro)’다. 미국에 친척이 많고, 열성 당원인 모친 덕분에 칼로스는 인맥이 넓고 정보력이 뛰어났다. 쿠바를 찾은 미국의 억만장자 연예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경제활동에 필요한 관료들을 연결해주는 중개상을 하며 큰돈을 벌고 있었다.

쿠바계 미국인 중에서는 쿠바를 옆집처럼 드나드는 이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몇 년 전부터 쿠바의 민영화 정책이 확장되면서 쿠바 부동산과 고급 클럽과 식당에 투자하는 ‘큰손’들도 꽤 있다. 그런 자본가들이 찾는 해결사가 칼로스 같은 ‘프런트’다.

“2018년에 라울이 물러나야 변화가 피부로 느껴질 거야. 외국에서 돈이 아무리 들어와도 쿠바 정부는 천천히 움직이니까.”

칼로스는 다른 쿠바인들과 마찬가지로 변화를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하고 있었다.

“카스트로 정부가 제일 두려워하는 상황은 천안문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거야. 그래서 쿠바는 중국이 아닌 베트남 모델을 추구하고 있어. 베트남 가봤지? 거긴 어때? 아무래도 시장이 개방되면 많은 것들이 변하지 않아?”

“자본주의가 퍼진다고 민주주의가 성립되지는 않지만, 더 많은 사람이 돈을 갖게 되고 부자가 되면 경제적인 권력이 분산돼. 그러면 사회가 민주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는 있어.”

정치적으로 예민한 주제라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흠… 쿠바가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더라도, 쿠바의 정체성은 지켰으면 좋겠다.”

“쿠바인들이 미국인들과 똑같은 세상은 정말 비극일 것 같아.”

많은 쿠바인이 칼로스처럼 경제적인 부를 원하지만, 외세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자긍심인 혁명정신 또한 지키고 싶어했다. 품위를 지키면서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칼로스의 희망사항에 맞장구쳐줬지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세상 모든 것에는 가격과 대가가 있지 않을까.

3 새로운 미래를 맞게 될 쿠바의 어린이. [쿠바 정승구]

『노인과 바다』는 혁명의 예언서였나
쿠바를 사랑한 헤밍웨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노인과 바다』는 예언서에 가까웠다. 쿠바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쓰인 이 소설은 피델 카스트로라는 ‘노인’과 혁명이라는 ‘청새치’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노인은 쿠바에 자부심과 용기 그리고 꿈을 심어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도 가지 않는 멀고 깊은 바다에서 대어를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줬다.

쿠바는 20세기 역사가 만들어낸, 그 어떤 예술가도 감히 모방할 수 없는 아주 기이하고 독창적인 작품이 틀림없다. 곳곳에 숨은 보석들이 반짝이는 나라. 열정적이고 유혹적이고 모순되고 현실적이면서도 고전적인 나라. 어쩌면 그 명작은 이제 또 다른 진화 단계에 있는 것이리라. 미국이 경제제재를 철회하는 해피엔딩은, 오랜 기간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온 쿠바인들의 명분 있는 승리이자 역사적 정의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쿠바를 축하하고 싶다.

하지만 미국의 손길이 닿기 전 풋풋한 쿠바의 마지막 모습을 포착하고 온 나로서는 쿠바인들이 호모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된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같다는 슬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약 쿠바 구석구석이 스타벅스와 맥도널드로 도배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매몰돼 쿠바인들 고유의 ‘공동체 의식’을 잃어버린다면, 그건 좀 우울한 광경일 것 같다.

국제언어인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1100만여 명의 쿠바인들은 지식과 문화로 무장돼 있다. 아름다운 문화유산과 자랑스러운 혁명사는 쿠바인들의 저력이다. 근간이 탄탄한 쿠바는 앞으로 닥칠 그 어떤 변화도 슬기롭게 헤쳐나가서, 작지만 강한 나라로 거듭날 것이다.

쿠바는 지금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쿠바에서 본 쿠바의 미래는 밝았다. 그렇다면 쿠바를 통해서 본 우리의 현실과 미래는 어떤가. 어쩌면 그것이 쿠바를 보면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일 것이다. 



정승구 영화감독, 작가.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하버드대에서 정책학을 공부했다. 쿠바를 좋아한다. 크리에이티브 논픽션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을 썼다.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의 각본을 쓰고 연출하고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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