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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한·일 관계 볼모 삼는 아베의 억지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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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유지혜 기자 중앙일보 기자
가나스기 겐지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가 21일 오후 외교부로 초치되고 있다. [신인섭 기자]
유지혜
정치국제부문 기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일본은 21일 발표한 방위백서에서 또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했다. 2005년 고이즈미 내각 때 시작된 ‘방위백서 독도 도발’은 올해로 11년째다. 매년 도발을 하니 한국 정부도 ‘대응 매뉴얼’이 생겼다. 이상덕 외교부 동북아 국장은 오후 가나스기 겐지(金杉憲治)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를 외교부 청사로 ‘불러들여(招致·초치)’ 항의했다. 오전엔 박철균 국방부 국제정책 차장(육군 준장)이 고토 노부히사(後藤信久) 주한 국방무관(육군 대령)을 불러 항의문을 전달했다.

 하지만 이처럼 놀라울 것도 없는 열한 번째 도발이 올해는 유독 씁쓸하다.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일(6월 22일)을 맞아 상승 기운을 타는가 싶던 양국 관계가 다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해서다. 먹구름이 드리운 것은 이달 초 일제 강제징용시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부터다. 일본은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강제노동(forced to work)’이라고 발언해 놓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선 말을 바꿨다. 총리실도 관여했으면서 외무성이 한국과 협상을 잘못했다고 책임을 돌리더니, 이제 외무성 당국자들은 한국 탓을 한다.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이 스기야마 신스케(杉山晋輔) 외무성 외무심의관과 만나 해당 표현을 빼기로 해놓고 한국이 말을 바꿨다는 것이다. ‘강제노동’ 명시를 한 번도 포기한 적 없는 한국 정부로선 기가 찰 노릇이다.

 강제노동과 관련된 억지 외교의 정점은 19일(현지시간) 일본 미쓰비시가 미군포로 징용 피해자들에게만 사과한 것이다. 미쓰비시 대표단은 LA 사이먼비젠탈센터까지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중국인 징용자들에 대해선 “소송이 진행 중이라 의견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사이먼비젠탈센터는 친척 89명을 나치 손에 잃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사이먼 비젠탈(1908~2005)이 설립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나치 사냥꾼으로서 생전에 수많은 전쟁범죄를 고발했던 그가 봤다면 미쓰비시 대표단을 내쫓았을지 모른다.

 걱정되는 것은 다음달 나올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종전 70주년 담화에 ‘식민 지배 사죄’가 포함되지 않을 것 같다는 얘기다. 한·일 관계에 정통한 소식통은 “그렇게 되면 양국에서 잘 해보자고 했던 이들은 장렬히 전사하고, 한·일 관계는 몇 년간 더 힘들어질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아베 총리는 보수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강한 일본’ 드라이브를 걸어 왔다. 한·일 관계 악화는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부작용은 시작되고 있다. 안보법안 표결 강행 이후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취임 후 최저인 35%(마이니치신문)로 뚝 떨어졌다. 뉴욕타임스(NYT)는 20일 사설에서 “아베 총리가 식민 지배의 야만행위에 진정성 있게 사과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유지혜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