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나침반] 드라마 성패는 대본이 좌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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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의 인부들이 일손을 놓은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면? 현장감독이 초조한 표정으로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인부들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사정한다면?

까닭을 물으니 어이없게도 도면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대답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 가상의 상황은 건축현장이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 드라마 촬영현장의 풍경을 일부 옮긴 것이다.

드라마를 집에 비유한다면 대본은 설계도면에 해당한다. 시간에 쫓겨 대충 그린 설계로 살 만한 집이 지어질 리 없다. 만약 건축가가 반쯤 설계된 도면만을 갖고 집을 짓기 시작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결국 그 피해는 입주자(시청자)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SBS 드라마 스페셜 '술의 나라'가 방송을 시작할 무렵 작가 정성주씨와 통화한 적이 있다. 그는 '장미와 콩나물' '아줌마' 등을 통해 가정 안의 소소한 갈등을 사회문제 차원으로 끄집어내는 능력을 보여준 검증된 작가다.

'술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더니 전화를 통해 들리는 음성이 그리 밝지 않았다. "방송이 제대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에도 그냥 겸손의 말인 줄만 알았다.

'술의 나라'는 중간에 작가가 바뀌었다. 공사(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설계도면(대본)이 다 나와 있었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다. 연출자는 '사랑을 그대 품안에' '별은 내 가슴에' 등으로 시청자의 감수성을 어루만졌던 '영상의 마술사' 이진석 PD였다.

작품성(작가의 의식)과 상품성(PD의 감각)을 두루 갖춘 수작이 나오리라 기대했는데 여러 지점에서 많이 부딪친 모양이다.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고 '술의 나라'는 제목처럼 비틀거리다가 마침내 주저앉았다.

사전제작제의 사전(辭典)적 의미는 사전(事前)에 편집까지 다 끝내 완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이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대본만큼은 완전히 다 나온 후에 촬영을 시작한다는 원칙을 '현실'에서 준수해야 한다.

'드라마는 생명체와 같아서 시청자 반응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은 환경에 따라 기형을 만들 수도 있다는 억지로 들린다 ('인어아가씨'의 꼬리가 한없이 길어진 이유도 그 부근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작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스타급 출연자를 섭외하는 데 들이는 공과 시간을 작가의 발굴, 육성에도 분산해 투자하라. 작가 공모를 통해 '뽑아'놓고 그들이 다시 '뽑아'낼 때까지 그저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방송사마다 작가가 되는 통로를 3백65일 열어두고 안목과 사명감을 동시에 가진 사람들을 입구에 배치하라. 특히 인터넷은 예비작가들이 서식하는 바다에 비유할 만하다.

그물에 걸리는 고기만 기다리지 말고 직접 헤엄쳐 들어가 건강한 소재들을 건져내라. MBC가 새로 시작한 미니시리즈 '옥탑방 고양이'는 그 좋은 본보기다.

작가가 바뀐 건 '술의 나라'와 같은 시간에 방송된 KBS2의 '장희빈'도 마찬가지다. 중간에 연기자가 바뀌는 건 몸이 바뀌는 거지만 작가가 바뀌는 건 영혼이 바뀌는 것이다.

정성주씨의 드라마에 두 번이나 주인공역을 했던 김혜자씨에게 함께 다시 일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웃으며 답했다. "그분이 드라마를 다 썼다는 걸 확인한 후에 대답할게요."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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