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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 물속을 탐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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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호 09면

‘물의 아이들’(The Water Babies·2005~2007) 중 ‘미팅’(Meeting). 당시 다섯 살이었던 제나의 큰딸 브룩(왼쪽)이 직접 모델로 등장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전시장에 마련된 ‘샹그리라’(Shangri-la·2015) 포토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제나. 누가 사진작가 아니랄까봐 카메라 뒤가 아닌 앞에 서는 걸 쑥스러워한다.

낯선 공간과 조우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내 눈으로 보지 못한 사물, 내 손으로 만져보지 못한 풍경은 미처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우리의 감각을 자극해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세계 최초의 여성 수중사진 작가 제나 할러웨이

제나 할러웨이(Zena Hollowayㆍ42)의 사진을 만난다는 건 그런 일이다. 굳이 ‘세계 최고의’ ‘여성 최초의’ 수중사진 작가라는 수식어를 들먹이지 않아도, 그녀가 내민 이미지 한 장이면 누구나 넋을 잃고 그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 모델이 뿜어내는 오묘한 표정에, 그 색감이 빚어내는 기묘한 배경에 빠져들게 된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을 찾은 것처럼, 과연 이곳은 어디인가라는 의문을 안고 말이다.

그 기묘한 호기심을 품고 사진전 ‘the Fantasy’(7월 3일~9월 7일)가 열리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 7전시실을 10일 찾았다. 아시아 최초의 개인전을 위해 한국을 찾은 제나 할러웨이가 그곳에 있었다. 중동 바레인 출신으로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 역시 무척이나 설렌 표정이었다.

런던의 수중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제나 할러웨이. 그녀의 비밀병기는 바로 캐논 EOS 1DS MK II 카메라와 씨캠 하우징이다.

열여덟 제나를 바다로 이끈 건 빛이었다. 휴가차 이집트로 떠났던 그녀는 물속 세상에 푹 빠져 그대로 눌러앉았다.

“파도가 빛에 반사되는 걸 봤는데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답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죠. 대학에 갈 필요가 없겠구나. 나는 이걸 공부하면 되겠다 하고 말이죠.”

스쿠버 다이빙의 세계를 맛 본 그녀는 그 길로 강사로 전향해 홍해와 카리브 제도 등을 떠돌며 세계를 유영했다. 역시 바다를 사랑했던 제나의 어머니는 프로 다이버가 된 딸에게 수중 카메라를 선물했다. 그녀는 물에 들어갈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처음 본 이름 모를 물고기가 사진의 주인공이었고, 바닷속 세상을 형형색색 수놓는 산호초는 경탄의 대상이었다.

마냥 물이 편하고 좋았지만 물속 세상을 담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변변한 교과서도, 참고할 만한 서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다이빙 숍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수중 촬영 기술과 전해져 내려오는 팁만이 살아있는 지식일 뿐이었다.

도전이 늘 그러하듯 초반 몇 년은 실수의 연속이었다. “가장 어려운 건 노출이었어요. 어떨 땐 너무 밝았고, 어떨 땐 너무 어두웠죠. 바로 지금이다 싶어 셔터를 마구 눌러댔지만 확인해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경우도 많았어요. 포커스가 맞지 않았던 거죠. 다이빙 웨이트 벨트가 너무 무거워 꼭 담고 싶은 장면을 놓치기도 했고요.”

다행히 그녀의 깊어지는 내공과 함께 디지털 카메라의 기술은 날로 발전해 나갔고, 렌즈 안에 담아낼 수 있는 세상 역시 점점 넓어졌다. 땅과 달리 1.34의 굴절률을 가진 물의 풍경은 광각 렌즈를 통해 보정되기 시작했다. 스트로보가 빛 역할을 하면서 밝음을 보충했다. 카메라를 담는 하우징 기술까지 진보를 거듭하면서 왜곡되지 않은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11년 엘르 스타일 어워드 수상작. 제나의 사진은 패션과 수중 사진을 접목하는 전형이 됐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럭셔리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 ‘하우 투 스펜드 잇’에 실렸던 ‘슬리핑 뷰티’(Sleeping eauty·2014)

물을 캔버스 삼아 빛으로 그린 그림
1995년 런던으로 돌아간 그는 기존의 수중사진 작가들이 전혀 하지 않았던 일을 시작했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인물과 오브제가 가진 아름다움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다. “물은 캔버스고 빛은 물감”이라고 말하는 그는 수중 사진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물 속은 마법의 공간”이라고 대답했다. 지상에서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지만 물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인간은 그 어떤 요소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으며 그 틈새에서 대자연이 마법을 펼친다는 것이다.

한 우물만 판 그녀에게 부와 명성을 안긴 것 역시 마법처럼 다가왔다. 2011년 엘르(Elle) 스타일 어워드에서 수상한 ‘비 인스파이어드’(Be inspired)도 그중 하나다. 빨간 천과 검은 배경의 대비를 통해 나체의 모델이 한층 도드라져 보이는 그의 대표작이다. “모델이 붉은 패브릭을 잡고 있는데 어느 순간 마치 꼬리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대담한 물결 모양이 나타났어요. 그런 아이디어는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카메라를 통해 보는 순간 알았죠. 바로 지금이구나.”

우연한 포착이라고 치부하기엔 한 장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 투입되는 노력의 양은 결코 적지 않다. ‘6시간의 세팅, 9명의 스태프와 7대의 카메라, 8시간 동안 1468컷의 촬영, 57초간의 숨 참기로 얻어진 완벽한 작품’이라는 설명은 그래서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다. 헤어 디자이너는 스타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30분마다 모델의 머리를 매만져야 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수용성 화장품 대신 지용성 화장품으로 발색과 표현력을 고민했다.

이 같은 정성이 모여 만들어낸 섬세한 표정에 연신 감탄을 표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충분히 할 수 있다. 하길 원하지 않을 뿐”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물속에서 눈을 뜰 수 있지만 이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벌벌 떨며 6m 짜리 수조로 들어오는 모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온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일이죠. 심장 맥박이 빨라지면 필요로 하는 산소량도 많아지고 코로 숨을 쉴수록 더 많은 기포가 생겨나기 때문에 이를 막는 것이 급선무거든요. 이를 위해 항시 안전요원이 대기하면서 산소 공급을 해줘야 하지요.”

겁먹었던 모델들의 얼굴이 차분해지고 생기가 돌기 시작하면 이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미지를 기다릴 차례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자기 자신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모델들이 마법을 부리기 때문이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히려 숨겨진 내면의 아름다움을 끌어내게 하는지도 모른다.

제나는 여성 작가로서 가진 강점으로 “섹슈얼하게 찍으려 하기보단 우아하고 로맨틱하게 바라보는 점”을 꼽았다. 에르메스ㆍ베르사체 등 명품 브랜드에서 제나라는 이름만 듣고 한 벌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드레스를 기꺼이 내어주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터다.

‘스완 송’(Swan Song·2005) 연작 중 ‘에인절스’(Angels). 지난해 찰스 사치의 컬렉션에 추가된 작품으로 심연에 가라앉는 듯한 소녀의 모습이 존재의 소멸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의 아이들’ 중 ‘남한테한만큼너도받으리 요정’(Mrs Bedonebyasyoudid). 굴뚝 청소부로 착취당하던 고아 톰은 요정을 만나 물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배운다.

사치가 주목하는 그녀 “수중사진 개념 확대”
이번 전시에서는 그녀가 20년간 쌓아올린 필모그래피를 총망라하는 작품 20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2005년 완성된 연작 ‘스완 송’(Swan Song)이다. 세계적인 미술품 수집가로 알려진 찰스 사치의 컬렉션에 지난해 추가되면서 그녀를 예술가의 반열에 올린 작품이다. “제나의 작업은 물속을 하나의 무대로 삼고 연출을 더한다는 점에서 수중사진의 개념 자체를 확대했다”는 것이 사치의 평가다.

그동안 상업 사진과 예술 작업을 병행해온 그녀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개인 작업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나이키ㆍ소니 등과 국제적인 기업과 함께 광고를 찍고 하퍼스 바자ㆍ보그 등 패션지와 함께 일해왔지만, 기획 단계부터 직접 아이디어를 내는 창의적인 작업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바다의 거품에서 탄생한 지혜의 여신 아프로디테나 눈 감은 창백한 얼굴로 고독미를 더하는 ‘슬리핑 뷰티’(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 신화나 문학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은 그녀의 다음 행보를 짐작케 한다. 특히 찰스 킹즐리의 동화 『물의 아이들』(1863)에서 영감을 얻은 ‘물의 아이들’(2005~2007) 시리즈는 눈길을 붙든다. 학대와 굶주림으로 지친 고아 톰이 사고로 물에 빠져 아가미가 달린 물의 아이로 재탄생한다는 스토리를 모르더라도, 어둡고 지쳐보이는 아이가 천사처럼 빛나는 존재로 거듭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치유를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누드 역시 외설스럽기보단 마치 자궁에 웅크리고 앉은 아기마냥 성스러워 보이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터다.

일러스트 작가 하이디 테일러와 협업해 사진에 삽화를 입힌 것처럼 제나는 후 보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 좋은 작품이 탄생할 수도 있고,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절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새로운 사물을 그려넣는다거나 하는 인위적인 방식이 아닌 피부톤이나 색 보정 위주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색이 파란색이에요. 물속에서는 모든 것이 파랗잖아요. 파란 기를 빼내면 전혀 다른 느낌을 줄 수 있거든요.”

파란색이 싫다면서도 그는 계속 푸른 꿈을 꾸는 듯했다. 물속의 작업이 고될 법도 한데 더 위험하고 험난한 바다에서의 촬영이 더 행복하다고 했다. 신이 나서 ‘해리 포터’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찍었던 웨스트 런던의 수중 스튜디오에 대해 얘기했다. 자신만의 전용 수조 건축 계획을 들려줄 때는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인터뷰에 동석한 큰딸 브룩(13)은 ‘물의 아이들’에 출연했던 모델답게 “물속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도 곧 다이버가 될 것”이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 셋을 물속에서 낳고 키우며 동물들과 함께 유유자적 헤엄치는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경계를 어떻게 넘을 것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제나 할러웨이ㆍ전호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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