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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는다 그리고 떠난다 트렁크, 디자인의 유산이 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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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호 24면

루이뷔통의 상징인 특별 주문 트렁크들. 개인의 여행 목적에 맞게 다양한 형태와 디자인으로 제작됐다. ⓒJ.Oppenheim-2013

요즘 파리의 명소는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Foundation Louis Vitton)’이다. 지난해 10월 프랑스 패션 브랜드 루이뷔통이 문 연 이곳은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설계했다는 사실과 세계 유수 박물관과 협력한 전시로 일찌감치 화제가 됐다. 그리고 불과 9개월이 흐른 지금, 루이뷔통은 다시 새로운 전시 공간을 선보인다. 파리 시내에서 차로 20여 분 떨어진 작은 마을, 아니에르 쉬르 센(이하 아니에르)에 자리한 ‘갤러리(La Galerie)’다.

루이뷔통 재단 ‘아니에르 갤러리’ 가보니

아니에르에 대해서는 잠시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기실은 루이뷔통이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로 성장한 터전이다. 브랜드를 만든 지 5년 만인 1859년, 사업 규모가 점점 커지자 창업자는 이곳에 공방을 세웠고 일가는 그 옆에 저택을 지어 대대손손 머물렀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브랜드를 상징하는 여행용 트렁크의 주문 제작이 바로 여기서 이뤄진다.

루이뷔통의 연이은 갤러리 개관은 예상 밖의 일이었고 그래서 궁금했다. 8년을 공들인 ‘전작’과 다른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무엇보다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공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호기심을 부추겼다. 때마침 각국 VIP와 주요 매체를 초대한 오프닝 행사가 5일 열렸다. 중앙SUNDAY가 그 현장을 찾았다.

아니에르에 자리한 루이뷔통 저택과 공방 건물 ⓒJ.Oppenheim-1959
▶아니에르 갤러리 주소: 16, rue Louis-Vuitton, Asnieres-sur-Seine. France.
공식적으로는 일반 개방이 되지 않아 사전 예약이 필수다. 문의 전화: 02-3432-1854

연대기적 나열 아닌 시대공간 초월한 전시 방식
한적한 주택가 골목길로 100m 가량 들어가니 루이뷔통 공방이 나타났다. 겉에서 보면 여느 개인 주택이나 다름없어 보이지만 안으로 걸음할수록 새로운 광경이 펼쳐진다. 아르누보 양식의 저택과 장식을 배제한 공방 건물이 나란히 서있다. 새로 문 연 갤러리가 어디일까 싶었는데, 공방과 아카이브 창고로 쓰던 건물의 일부를 개조해 마련했다고 한다. 604㎡ 면적이 1·2층으로 나눠져 있는 구조로, 루이뷔통의 명성을 고려하면 약간 협소하다고 여겨진 게 첫 인상이었다.

허나 그것이 포인트다. 번드르르한 새 건물보다 기존 공간을 이용한 사실만으로 이미 미술관의 의미는 분명해보인다. 브랜드의 유산을 극대화시켜 보여주는 게 최우선 목표요, 그로써 시공간을 초월한 가치로 승화시키려는 의도라고나 할까.

전시 역시 이에 대한 응답으로 들렸다. 흔히 유산이라 하면 연상되는 연대기적 나열을 벗어나 있다. 테마를 16개(시작, 모험의 가능성, 쿠튀르의 예술, 아방가르드 등)로 나누고 그에 따라 역사를 재조합했다. 가령 1924년 3세대인 가스통 루이뷔통이 만든 직물 여행용 백 키폴(Keepall)과 현 디자이너인 니콜라스 제스키에르가 2014년 선보인 볼링 배니티백(Bowling Vanity Tuffetage)이 한 테마 안에 나란히 놓이는 식이다. 2013년 브랜드를 떠난 마크 제이콥스와 남성복 디자이너 킴 존스의 의상이 한 테마 안에 공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브랜드 측이 아카이브를 근간에 두면서도 이곳을 박물관이 아니라 굳이 ‘갤러리’라 명명한 이유다.

아니에르 갤러리 내부 모습. 16개 테마로 나눠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아이템을 교차적으로 선보였다. ⓒLouis Vuitton / Grégoire Vieille
3대손 가스통 루이뷔통이 1930년에 만든 퍼즐 ‘파테키’ ⓒ Louis Vuitton Malletier

기발하고 다양한 트렁크 한 자리에
아카이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루이뷔통의 아카이브는 실로 방대한 보물창고다. 20만여 건의 문서(이중 11만 건이 고객 기록이다)와 2만3000개 오브제의 집합체다. 큐레이터조차 1930년 가스통 루이뷔통이 고안한 퍼즐게임 파테키(pateki)를 새롭게 발견하고 여기서 전시의 영감을 떠올렸을 정도다.

이번에 나온 400여 개 아이템은 그 아카이브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을 고르고 추린 결과물이다. 그리고 최고의 유산으로 트렁크가 집중조명됐다. 창립자가 나무상자 가방 장인의 견습생이었다가 왕궁에서 짐 싸는 공식 패커로 일했던 사실은 이미 알려진 터.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 매장을 내면서 기발하고 다양한 트렁크를 선보이며 가업을 일궜다.

그 트렁크의 역사를 글로만 배웠던 이들이라면 전시장은 역사적 현장이다. 과거 맞춤으로 만든 제품들은 모자·구두는 물론이고 세면도구·카메라·약 전용 디자인까지 다양하다. 모양 역시 사각·원형만이 아닌, 자동차 트렁크에 꼭 맞는 것도 있다. 고급 맞춤복 디자이너였던 폴 푸아레와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루이뷔통 고객이었던 이들의 소장품도 포함돼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전시품을 올려놓은 선반과 캐비닛조차 허투루 만든 것이 아니란다. 하나하나가 모두 포퓰라 나무로 제작됐고 바퀴가 달렸는데, 이것은 루이뷔통 트렁크의 재료가 포퓰라 나무이며 또 실제 트렁크처럼 바퀴로 ‘이동성’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하나 더. 전시장 곳곳에 걸린 액자 테두리에는 동그란 징들이 박혀있는데, 이는 실제 트렁크에 박힌 징에서 따왔다고 한다.

ⓒJ.Oppenheim-2015

공방 건물 벽의 먼지까지 유산의 일부로
과거의 유산을 현재와 조우하고 미래적 가치가 담긴 작품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예상대로 루이뷔통이 택한 것은 아티스트와의 협업이다. 전시장 초입에는 거대한 평면 설치 작품(오르헤 오테로 파일로스 작)이 세워져 있는데, 그냥 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다. 한지 같이 빛이 투영되는데, 비정형의 패턴이 도드라진다. 큐레이터인 파울라 알라스키에츠가 이에 대해 설명했다. “작가가 공방의 건물 한 벽에 사각 라텍스를 교차적으로 붙인 뒤 시간이 흐른 뒤에 떼어냈어요. 자연스럽게 먼지가 묻고 안 묻으면서 체크판 패턴이 생겨났죠. 마치 루이뷔통의 대표 문양인 다미에(같은 크기의 정사각형으로 구성된 격자 무늬)처럼요.” 작품은 그 중 일부다.

일러스트레이터인 루벤 톨레도는 다이아몬드 패턴의 벽지에 들어맞는 도시 풍경을 선보였다. 이는 루이뷔통 트렁크 내부에 있는 다이아몬드 무늬인 ‘말타주’를 연상시키는 시도다. 또 스텐판 존스는 과거 쿠튀르 기준에 맞는 모자를 다시 창조해냈다. 자수디자이너 로지 테일러 데이비스 역시 전시장에 모아놓은 모든 디자인을 검토한 뒤 의상 몇 벌에 다시 옮기는 작업을 벌였다. 원본 스티치의 복원은 물론 원래 의상이 지닌 LV패턴까지 되살려냈다.

패션 박물관학 교수이자 1년여 간 이 전시를 준비한 주디스 클라크는 패션전문일간지 WWD와의 인터뷰에서 기획 의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뭔가 영원하고 완결성 있는 것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면 이곳에 오라”고. 뻔한 아트 마케팅인줄 알면서도 이 전시에 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아니에르(프랑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루이뷔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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