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금동원과 빈지노, 문제적 엄마와 아들이 사는 법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여성중앙] 서양화가 금동원과 스타 래퍼 빈지노

부모의 존재는 등대와도 같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라는 질문에 길잡이가 되어주는 존재. 우리 엄마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는 아들을 만났다. 발매하는 곡마다 음원 차트를 ‘올킬’ 시켜온 인기 래퍼 빈지노 군과 사실은 아들보다 더 유명한 엄마 서양화가 금동원씨다. 오랜만에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를 연 엄마의 전시장에 아들이 등장하자 일대가 술렁였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예술을 이야기하는 엄마와 귀가 즐거운 예술로 말을 걸어오는 아들. 다른 듯 닮은 엄마와 아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이다. 알려졌다시피 엄마 금동원은 색채로 말하는 서양화가. ‘아름다움의 시원’이나 ‘사유의 숲’ ‘색채, 생명의 시가 되어’ 시리즈에서 보여준 색을 주축으로 자연을 대하는 기분 좋은 장면들을 연출해왔다. 그림 속 푸른 숲엔 예쁜 집이 있고 강줄기 사이로 나비가 날아든다. 때론 나뭇가지에 물고기가 떠 있기도 하다.

이 시각적 은유에는 경상북도 영주의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서 자란 작가의 어린 날이 배어 있다. 엄마는 아들의 어린 시절에 자신이 보았던 자연환경 그대로를 녹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뉴질랜드에 있는 지인에게 부탁하며 잠시 조기 유학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경기도 양평으로 데려갔다. 아들은 그때부터 자그마한 시골 학교에 다녔다. 엄마는 자신이 보았던 것들을 아들도 보아주길 원했다. 구름과 별이 만들어주는 아득한 은유를 느끼길 말이다. 아들의 대답이 반전이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놀았던 건 좋았는데… 그땐 도시로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도시에 있는 여자 친구를 만났죠.”

재작년 말쯤이었다. 빈지노의 싱글 ‘Dali, Van, Picasso’는 발매와 동시에 차트 1위에 올랐다. 한국 힙합 뮤지션으로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데뷔 무대라고 정해둔 적은 없었다. 2008년 그가 부른 곡이 힙합 커뮤니티에 링크되었는데, 그때 뮤지션들 사이에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가 뛰어난 래퍼로 인정을 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싶다. 2012년 발표된 빈지노의 첫 솔로 앨범 24 : 26을 들어보길. 여러 곡 가운데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NIKE SHOE’부터 들어봤다. “잔잔한 선율에 맞춰 민트색 나이키 슈즈를 신은 여자 친구가 호리호리한 등에 멘 백, 스키니 진에 스니커즈가 비키니보다 더 섹시”하다는 래퍼의 감상, 느낌 있게 산책하는 젊은 청춘들의 이야기가 눈앞에 그려졌다.

얼마 전 실시간 검색어로 떠오른 그의 여자 친구이자 독일 출신 패션모델인 스테파니 미초바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앨범 제목대로 스물넷, 스물여섯의 청청한 삶을 예민하게 짚어낸 래퍼의 시선이 신선하다. 자조 섞인 래퍼의 목소리가 인상적인 곡도 있었다. 제목은 ‘If I die Tomorrow’. 빈지노는 이 곡을 통해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쳤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 처음 배운 언어인 영어와 빨주노초 물감을 덜어 새하얀 도화지를 총처럼 겨눴던 어린 화가의 경력은 뜬금없이 힙합에 눈이 멀어 멈춰버렸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는 호기 어린 이야기 그리고 새아버지에 대한 존경”까지…. 이 시대를 사는 스물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가사에 읊어낸 젊은 래퍼의 외침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랭보의 시 구절을 듣는 듯하다. 개인의 인격에 부대낀 일상의 개념을 잘 녹여냈다고 해야 하나.

해석은 제쳐두고 그냥 끌린다고 해야겠다. 래퍼로서 오랜 시간 자괴감과 자존감 사이에서 사고한 결과물은 아주 심플하다. 귀에 쏙쏙. 직설적인 그만의 화법은 대중에게 빈지노란 이름을 각인시켰다. 스타일과 패션, 그의 연애사까지 인간적인 면모도 매력적이다. 그의 유년 시절은 어땠을까. 한때 연기자를 꿈꾸었을 땐 고등학교 수업 대신 연기 수업을 들었고, 남들이 앞다퉈 가고 싶어 하는 서울대학교를 그만두기도 했던 제도권 밖의 선택. 엄마는 아들을 그저 기다려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아들에게 웃으며 묻는다. “기다려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

화가 금동원은… 색채의 시인, 색채의 연주자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서양화가다. 경기 양평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는 자연의 감성을 적어 내려간 그림들이 놓여 있다. 1995년 ‘아트 앤 워즈 멜버른’ 최고작가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의 작품은 개인전을 열 때 무료로 관람할 수 있고, 서울 압구정 인근의 아트 숍 ‘색상’에서도 만날 수 있다.

빈지노 음… 우리 엄마는 그런 엄마는 아니었어요. 친구들이랑 놀고 있으면 간식을 만들어 넣어주고,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그런 내조 스타일의 엄마들이 많잖아요. 뭐 그래도 서운하진 않았어요. 배고플 때는 아주 쪼끔 부러웠지만. 우리 엄마는 쿨했어요. 엄마와 전 어릴 때 이야기나, 네가 어릴 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류의 추억 팔이는 잘 안 해요. 현재 이야기를 하죠. 앞으로의 이야기도 포함해서요.

금동원 아들의 이야기가 재밌네요. 어머니와 아들은 생체적으로는 육혈이지만, 아이가 엄마와 동일한 존재는 아니잖아요. 저는 아이를 키우면서 제 아들의 정체성을 가만히 지켜 봐주려고 노력했어요. 작은 걸 챙겨주기보다는 큰 걸 지켜봐주는 거, 자기가 하는 일이 자신의 생혈이 되기를 기대했죠. 대단한 일이 아니면 어때요. 아이 혼자 놔두기도 하고, 나름대로 자신의 길을 찾으면 되는 거죠. 하지만 엄마로서 긴 시간 인내하며 아이를 놓아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어요. 전 아이의 미래를 좌지우지하지 않았어요. 제 작업을 하면서 기다려주었죠.

빈지노 저희 엄마가 다른 엄마들이랑 다르긴 한 것 같아요. 좀 친구 같죠. 제 친구들과도 대화가 잘 통하는 엄마였어요. 여자 친구가 생기면 늘 엄마에게 말했어요. 숨기고 나중에 놀라시게 하기 보다 처음부터 오픈해요. 떳떳하지 않은 이유로 연애하진 않았으니까요. 이 부분에 있어서 저는 가장 솔직했던 거 같아요. 지금 제 여자 친구인 스테파니와 가장 얘기를 많이 한 사람도 엄마예요. 친구들보다도 더요. 엄마는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신 분이거든요. 하지만 서로 대화가 잘 통하진 않은 것 같아요(일동 웃음). 서로 다르게 알고 있더라고요.

금동원 성빈이(빈지노의 본명은 임성빈이다.)의 지금 여자 친구가 맘에 들어요. 결혼도 자기 의사에 맡겨야죠. 엄청 빨리할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고. 지금은 잘 놀고 재밌는 것도 더 해야죠.

빈지노 그건 맞아요. 저는 어릴 때도 진짜 잘 놀았어요. 공부나 다른 해야 할 것들은 최소한으로 하고, 엄마 몰래 놀러 나갔죠(찡긋 웃음).

금동원 엄마가 속아주는 척한 건 모르지? 어릴 때 뉴질랜드로 유학을 보냈었어요.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일부러 한 학년을 낮췄어요. 한국에서 초등학교 4학년으로 시작했죠. 좀 느리게 가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자기 자신이 주도하는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고요. 외국의 낯선 언어가 스며든 만큼 한국 생활에 공백이 있었으니까 1년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성빈이는 그런대로 잘 적응했어요. 그리고 전 제 아이가 어린 시절을 작은 마을에서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양평 소도시에서의 경험이 앞으로의 인생에 큰 그림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바글바글 사람들이 많고, 규모가 큰 도시에서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존재적 시간이 적잖아요. 학교를 마치면 남학생들은 담임선생님과 함께 흙먼지 날리면서 공을 찰 수도 있고요.

빈지노 안 그랬는데…. 선생님과는 안 했죠. 저희끼리 놀았죠.

래퍼 빈지노는…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증명하는 뮤지션이다. 기존의 래퍼들에게 접하기 어려웠던 랩 스킬은 물론이고 그만의 언어를 통해 유려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첫 음반 ‘24 : 26’을 통해 그의 재능을 각인시켰으며 ‘생활의 발견’을 통해 습작처럼 적어 내려간 노랫말로 힙합 음악계를 흔들었다. 서울예고 재학 시절 미술학도의 꿈을 키워 서울대학교 조소과에 진학했으나 그전부터 쭉 해온 음악을 하는 길로 선회, 래퍼로서의 삶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 래퍼 빈지노는 분명 아이돌이나 연예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언더 래퍼도 아니다. 기존의 한국 음악 시장에선 없었던 존재다. 독특한 포지셔닝. 대형 기획사 대신 자신만의 스튜디오 그룹 ‘IAB’를 운영하는 아티스트로서의 독보적인 행보도 그렇다. 이런 생각의 출발점에는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예술가적 DNA가 뒷받침되고 있었다

금동원 그랬구나. 토요일마다 옆집 친구 생일잔치에 간다고 할 때가 재밌었어요. 케이크나 포장된 선물이 아니라 헌 옷을 싸서 가더군요.

빈지노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엄마, 내 어린 시절을 지어내는 것 같은데?

금동원 그럼 토요일마다 친구 생일잔치 갔던 건 아니니(웃음)? 딴 데 간 거니? 빈집 탈환 작전 같은 거 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빈지노 생일잔치는 갔어요. 도시 아이들처럼 모이며 방에서 컴퓨터 게임만 하고 그러진 않았어요. 밖에서 많이 놀긴 했어요. 학교 수업을 마치면 집 근처 산으로 동굴을 찾으러 갔었어요. 박쥐를 본다고요. 사실, 그런 건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금동원 아들의 시각과 엄마의 시각은 다를 수 있죠. 예술가의 눈으로 보자면 창의적으로 삶을 연장하는 데는 굳이 예술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재능을 찾아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봐요. 젊었을 땐 고흐의 다락방과 같은 작은 작업실에서 큰 작품도 하곤 했어요. 제가 작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성빈이가 그 작은 공간에 몸을 비집고 들어왔었어요. 허리를 반쯤 걸치고서라도 만화를 그리든지 붓질하든지 뭔가를 했었어요.

빈지노 엄마의 의도는 알겠는데, 저는 당시엔 좀 힘들기도 했어요. 도시의 삶을 동경하기도 했으니까요.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듣고 싶은 음악 CD나 같이 힙합 음악을 듣는 친구들이 많은 도시가 좋았죠. 엄마가 말하는 풍경…. 좋긴 한데, 당시 전 뉴질랜드에서 왔는데 양평 풍경이 더 좋은 건지 잘 모르겠기도 했고요. 물론 지금은 다르다는 걸 잘 알겠어요. 거대한 풍경이 주는 웅장함이 있고 소박한 풍경이 주는 진지함도 있으니까요. 양평에 있었던 시간이 제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인 것만은 분명해요.

금동원 그게 나의 콘셉트야(웃음).

빈지노 엄마가 절 시골에 두셨지만, 전 나름대로 제 살길을 찾았어요. 컴퓨터로 음악을 찾든, 서울에 갈 일을 만들든. 여자 친구를 사귀어도 꼭 서울 사는 여자 친구여야 했어요(일동 웃음). 제가 수동적인 성격이었다면 엄마의 교육적 효과가 없었겠죠. 엄마의 선택에 때로는 반기를 들기도 했죠. 그 자체가 조화로운 싸움이었던 것 같아요.

금동원 말 잘하는 데 아들? 그런데 반항을 했었나? 전 잘 못 느꼈어요. 뭔가 분출하기 위해서 저항한다거나 반항한다거나 그런 일이 거의 없었어요. 아! 있었다. 이태원 가서 힙합 바지 사서 입고 다닐 때.

빈지노 그건 엄마랑 나랑 이야기된 거였지. 공부를 이만큼 하고, 혹은 엄마와 약속된 일을 했으면 주말에 외박해도 되는 거였고. 평일 동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다 해두고, 주말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던 거지.

금동원 그래도 엄마가 공부하라고 했던 적은 없지 않니?

빈지노 엄마가 공부하라고 한 적은 없지만, 예고 입시를 통과하려면 공부를 어느 정도 해야 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금동원 아들이 뉴질랜드에 있을 때도 늘 힙합 음악이 담긴 테이프를 사 보내곤 했어요. 전 한국에서 제 작품 활동을 해야 했으니까요. 성빈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큰 나무 밑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있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이곳에서 소리와 음악이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 정작 성빈이는 그 말을 한 걸 기억을 못 하더라고요. 엄마로서 아들이 흥미를 보이는 걸 알아봤죠. 힙합 하는 형들과 같이 녹음도 했다고 하고, 이태원에도 자주 가고. 사실 제가 작품을 하는 시간 동안 성빈이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때 끄적이면서 뭔가를 했던 거 같아요. 아들의 습작 노트를 가끔 봤어요. 래퍼니까 자신의 언어가 중요했을 거예요.

빈지노 제가 엄마에게 소리와 음악이 날아다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는 건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런 생각을 했던 건 기억이 나요.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요. 대신 종종 엄마에게 살짝 반항하긴 했죠.

금동원 반항다운 강력한 반항은 별로 없었어요. 존재 자체가 반항일 때는 있었지만(웃음). 성빈이가 중학생 때였는데, 서울예고에 견학을 한번 갔던 것이 미술을 전공하는 계기가 됐어요. 그냥 슬쩍 학교 구경을 시켜줬는데 ‘여기 갈까?’ 이러더라고요. 선생님께 상담을 받아보더니 공부도 잘해야 한다고 하고,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은 상황이었죠. 그때 딱 한 번 반에서 공부로 1등을 했었어요. 그때 알았죠. 아, 내 아들은 뭔가 하고자 하면 하는구나. 또 성빈이가 서울예고에 다닐 때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어요. 연기 학원에 다니느라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죠. 그래서 아예 자퇴를 시킬까도 고민했었어요. 그러다 자기 스스로 연기자는 자신이 갈 길이 아닌 것 같다며 다시 미술을 하겠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때 저는 한 달만 더 고민해보라고 했어요. 그 이후에도 다시 미술을 하겠다더라고요. 물론 또 시간의 공백이 있었고, 재수를 하게 됐죠. 그리고 서울대학교 조소과에 합격했어요. 물론 학교에는 가고 있지 않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있으니까요. 큰 그림에서는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빈지노 6개월 정도 연기 학원에 다녔어요. 근데 그 길은 제 길이 아니었어요(멋쩍음…).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영어 점수는 잘 나오는 편이었으니까 필요한 점수만 얻으면 될 것 같았고,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데 연기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뮤지컬 수업을 할 때였어요. 고음이 안 올라가는 거예요. 그때 ‘이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제가 그 세계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그때는 힙합에 빠져 있을 때여서 옷은 물론이고 머리도 밀고 있었는데, 당시 연기 학원에서 뭔가 스타일을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들었었어요. 기분이 나빴죠. 제 아이덴티티를 바꾸라는 거였으니까요.

화가 엄마는 래퍼로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무엇을 하기’보다 ‘무엇을 하지 않기’에 중심을 두었다. 엄마에게 기다려주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예술은 불확실성의 싸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도록 한 엄마의 방식은 아들이 미술 입시를 치르든, 학교에 다니든, 하던 일을 잠시 멈추든, 인생의 상황이 달라져도 계속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붙잡고 노력할 수 있게 한 본질이 되었다

금동원 저는 연기 학원을 그만두는 일에 대해 한 달만 숙고해보라고 했어요. 무언가 쉽게 결정하는 건 아이의 미래에 긍정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때 성빈이는 다시 미술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관찰은 예민하게 하되, 아이가 원하는 바를 잘 끄집어내야 해요. 하지만 고3 엄마에게 쉬운 선택들은 아니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주려면 정말 마음을 다 비워야 해요. 성빈이가 음악을 워낙 좋아했었으니까 뮤지션이 되건 비즈니스를 하건, 아니면 CD 가게를 하나 내도 되죠. 중요한 건 자기가 원하는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이에요. 남들보다 5년 정도 지체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마흔이 돼서 보세요. 젊은 날의 5년은 긴 시간도 아니에요.

빈지노 엄마의 조언이나 선택은 늘 일관된 편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유별나게 굴 때, 고등학교 가면 연기를 하겠다고 하고, 대학교 가면 다른 걸 하겠다고 했는데도 엄마는 “뭘 그리 특별하게 구느냐”고 말하시긴 했지만, 화를 내시는 일은 없었어요.

금동원 아들아, 그것도 나의 의도였단다(웃음).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어나갈 때 쉽게만 풀리면 뭐가 어렵겠어요. 아이가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긴 하죠.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아들 때문에 예고 수업을 빼달라고 학교를 찾아가는 엄마가 어디 있겠어요. 성빈이는 잘 모르겠지만, 학교 선생님 입장에선 문제적 엄마 내지는 약간 이상한 엄마였겠죠. 그래도 저는 꿋꿋하게 아들 편이었어요. 성빈이는 중고등학교 때에도 줄곧 음악에 빠져 있었어요. 매일 새벽 4~5시까지 가사를 쓰고 랩을 하곤 했으니까요. 나중엔 저도 중독돼서 성빈이 랩이 들려야 잠이 왔어요. 어느 날인가. 새벽 2시쯤이었을 거예요. 쌈디(슈프림팀 래퍼) 형에게 전화가 왔다며, 힙합 커뮤니티에 자기 곡을 올렸는데 조회 수가 엄청나게 올라갔다고 쾌재를 부르더군요.

빈지노 음악은 늘 하고 있었어요. 제가 예고에서 미술 공부를 하긴 했지만, 음악은 초등학교 때부터 하고 싶었어요. 제가 랩을 막 시작할 시기에 GD(지드래곤)가 자신의 앨범을 냈었어요. 그땐 뭐랄까. 당시엔 대형 기획사의 트레이닝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고민했었어요. 전 혼자서 좋아하는 음악을 꾸준히 쭉 했을 뿐이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기획사에 들어가기보다 스스로 저만의 작업을 만들어나가야겠더라고요. 기획사 러브콜도 있었는데, 그때도 부모님은 크게 관여하지 않으셨어요. 스스로 결정하길 바라셨죠. 그래서 전 지금 소속사가 없어요. 제 음악 작업은 집에서도 하고 작업실에서도 해요. 지금은 맘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IAB’ 라는 스튜디오 그룹을 운영하고 있어요. ‘I have always been’의 약자예요. 항상 무언가를 해왔다는 뜻이죠. ‘Dali, Van, Picasso’ 를 발매할 때 그 친구들과 함께 앨범 재킷 콘셉트를 정했어요. 모델 김원중이 걸고 있는 목걸이는 달리의 ‘늘어진 시계’, 고흐의 ‘자화상’,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를 본 떠 만든 거예요. 친구들과 함께 있다 보면 농담도 창의적으로 하게 돼요.

금동원 아들의 정체성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건 저 역시 예술가적인 삶에서 함정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성빈이가 대학 시험에 떨어졌을 때, 저는 사실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른 길로 갔다 다시 미술을 하게 됐을 때 단번에 일이 잘 풀린다면 얼마나 인생이 만만해지겠어요.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경험이죠. 실패 경험도 필요해요. 그리고 성빈이가 대학에 갔고, 저는 또 열심히 제 작업에 열중했죠. 그런데 아들의 느낌이 조금 이상한 거예요. (아들을 바라보며) 지금도 대학에 적은 두고 있지?

빈지노 (엄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어어.

금동원 성빈이는 기질적으로 저랑 좀 닮았어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누가 무언가를 하라고 강요하면 싫어하고. 인생에서 뭔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엔 그런 면들이 발현되지 않나 싶어요. 저나 성빈이나 표현하는 직업이니까요.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나요.

빈지노 제가 랩을 만들 때는 평상시 하는 생각이 중심이 돼요. 어렸을 때는 가족, 친구, 여자 친구 등등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지금은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말하고 제 시선에서 맘에 들지 않는 세상 이야기도 담아요. 제가 단지 유명해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제 삶을 컨트롤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것이 아니라면 제 삶의 일들이 다른 사람들의 흥밋거리로 전락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속한 사회가 좀 더 다양한 시각을 인정해주면 좋겠어요. 래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걸 즐기면서도 때로는 겁이 날 때도 있고 제 의도와 다르게 무언가가 회자될 때는 화도 나죠. 대형 기획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매니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앨범 작업도 해야 해서 저는 제 관리를 잘해야 해요. 끌려다니는 삶보다는 스스로 살아가는 힘이 필요해요.

금동원 저는 성빈이가 친구들과 함께하는 아트워크가 참 흥미로워요. 제가 하는 순수 미술은 뭐랄까. 개개인이 그리고 즐기는 소유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통을 초점으로 두자면 지금 성빈이가 하고 있는 작업이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해요. 성빈이가 어떤 인터뷰에서 ‘실패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 대답이 맘에 들어요. 시대정신을 껴안고 가면서 자기 자신 속에 꿈틀거리는 뭔가를 끌어낸다는 자체가 재미가 있어요.

빈지노 지금은 독립해서 엄마와 따로 살고 있어요. 가끔 만나는데 평소에 엄마를 생각하면 찡한 감정이 일 때가 있어요. 좋은 추억이든 또 지나간 이야기든. 지금 하고 있는 음악과 제가 어릴 때부터 해온 미술적인 영감을 함께하는 설치나 예술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기는 해요. 저희 팀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엄마와의 컬래버레이션도 몇 번 생각해본 적 있긴 한데, 3초 만에 안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너무 예쁘고 꽃이 많고….

금동원 억지 춘향으로 맞출 필요는 없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지만 (너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앞으로 고려는 해볼게(웃음).

기획 여성중앙 조유미, 사진 박지홍(cao studio)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