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 떠나면 기업 미래도 어둡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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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국내 기업에서 10년 근무한 뒤 최근 외국계 회사로 옮긴 한모(38)씨는 요즘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일찍 퇴근한다. 대신 밤에 미국 본사와 전화로 업무를 본다.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게 된 덕에 요즘 둘째까지 생각 중이다. 한씨는 “외국계 회사는 실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근무시간도 유연하다”며 “국내 기업에선 일과시간이 끝나도 상사가 퇴근할 때까진 기다려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장시간 근로에 길들여진 남성 중심의 직장문화만 바꿔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게 훨씬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개발연대 한국의 직장은 남성 중심이었다. 회사에서 남자들끼리 일하고 밤늦은 술자리까지 일의 연장으로 인식됐다. 뿌리 깊게 박힌 이런 관행과 문화가 사회에 진출한 여성의 출산을 기피하게 만드는 ‘크레바스(빙하에 생긴 거대한 틈)’가 되고 있다. 더욱이 2009년 이후 여성의 대학진학률은 이미 남성을 앞질렀다. 그만큼 여성의 사회적 성취 욕구도 높아졌지만 직장문화는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러니 출산이 집중되는 30대에 직장을 그만두는 ‘마미 트랩(엄마의 덫)’에 빠지거나 아예 출산을 기피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

 윤희숙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20대 때 세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가 30대 뚝 떨어지고 40대 이후 다시 높아지는 전형적인 M자형”이라며 “여성의 사회 진출이 갈수록 늘고 있는 만큼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직장 여성의 출산 기피 현상은 더 확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4월 기준 15~54세 여성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육아·결혼 등으로 직장을 떠난 여성은 197만7000명에 달했다. 여성 인재의 사장은 국가적 손실이기도 하지만 우수 인력을 확보해야 하는 기업으로서도 타격이다.

 유럽에선 1990년대부터 일·가정 양립 환경을 구축해 여성 경제활동과 출산율 제고에 성공하고 있다. 유연근무제·시간근무제 일자리를 늘린 데다 정부가 적극 지원한 덕분이었다. 성상현 동국대(경영학) 교수는 “여성의 사회 진출은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는 만큼 여성 인재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기업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양대 이상빈 경영학부 교수는 “출산·육아를 지원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정부가 과감한 세제와 금융혜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동호 선임기자, 박현영·정선언·김민상·김기환 기자 d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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