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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과묵한 그가 보여준 부드러운 카리스마

중앙일보

입력

쇼스타코비치의 이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대형 관현악단이 필요 없는 곡이다. 솔로 트럼펫 한 대와 현악 오케스트라, 즉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의 악기군이 전부인 소편성의 곡. 게다가 2악장은 계속 쿵짝짝 쿵짝짝이 이어질 뿐인 단순 3박자의 곡이다. 이 정도로 간단한 곡을 이 정도로 대단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때는 악보도 지휘자도 폼인 줄만 알았거늘, 그가 객석으로 내려간지 30초 정도가 흘렀을까. 한 몸처럼 움직이던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이내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악장이 한 쪽 눈썹과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수습 불가능 상태가 된 오케스트라를 구하러 그가 무대 위로 돌아왔다. 먼저 음악을 멈추고 어디서부턴가 새로 시작하자고 말할 줄 알았건만 그러지 않는다. 몇마디 말도 없이 그저 태연하게, 각 악기군에 몇 회의 큐를 주니 한 악기씩 슬며시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다. 어렸을 적에 내가 가지고 놀던 변신 로보트처럼 두어번의 손놀림에 다시 원래의 모습이 되었다. 말문이 막히는 기묘한 솜씨에 나와 악장이 다시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2년이 지난 2014년 9월,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나와 연주할 오케스트라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다. 로테르담 필하모닉은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와 더불어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70년대의 에도 드 와르트와 80년대의 데이빗 진만의 지휘봉 아래 국제적 수준으로 도약하였고 90년대 중반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게르기예프의 리더십으로 완벽한 자기 색깔을 갖추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직까지도 매년 ‘게르기예프 페스티벌’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이 오케스트라를 보면 그들에게 그의 존재가 얼마나 각별한지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2014년 이 페스티벌의 오프닝 콘서트에서 연주하기로 되어있었던 내가, 리허설을 하러 가던 기차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물론 리허설이 시작되기까지는 아직도 네 시간 정도가 남긴 했지만 혹시나 늦으면 어쩌지? 이 와중에 믿을 거라곤 딱 하나밖에 없었다. 다름아닌, 마에스트로가 제 시간에 나타날 리 없다는 사실. 그런데 여섯시쯤 겨우 로테르담에 도착해 리허설 시각에 딱 맞춰 홀에 당도한 내 앞에 저 멀리 허겁지겁 뛰어가는 두 사람이 보였다. 어라, 저게 누구? 맙소사, 그와 그의 어시스턴트다.

그런데 그가 늦긴커녕 리허설 시각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뛰어가고 있다고? 더 부리나케 뛰어 그를 따라잡았다. “마에스트로, 안녕하세요!” 그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답한다. “어, 너! 결국 제 시간에 왔네? 잘됐다, 빨리 가자!” 맙소사, 이 남자.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내가 연주하는 협주곡은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 곡은 더블베이스가 손이 바쁘게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는 가운데 콘트라바순이 멜로디를 연주하며 시작한다. 둘 다 워낙 음역대가 낮은 악기인지라 음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들리는 대신 저 멀리서부터 웅얼웅얼대는 듯한 효과를 주는 것이다. 잘 시작한 음악을 그가 턱, 멈춘다. “거기, 음정 좀 확인해봅시다. 콘트라바순, 프렌치혼, 같이 해보세요.” 둘이 같은 음을 불자 그가 콘트라바순 주자를 가리키며 오른손을 살짝 들어올리는 동작을 한다. 음정을 살짝 올리라는 뜻이다. 콘트라바순이 미묘하게 음정을 높이는 순간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하모니. 단원들이 일제히 감탄의 한숨을 내쉰다. 웬일인지 한 마디도 대충 지나가는 법 없는 꼼꼼한, 이전엔 상상도 못한 그의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보통 이런 자세한 리허설에서 지휘자들은 주로 ‘이 부분은 이런 식으로, 저 부분은 저런 식으로’ 하라고 방법론을 곁들여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 노래를 불러주며 자신이 원하는 분위기를 전달했고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즐기며 스스로 귀를 열도록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간혹 던지는 그의 말이 이런 과묵함에 대비되어 더욱 빛을 발하기도 했다. 피아노의 긴 오프닝 카덴차가 끝나고 오케스트라 튜티가 나오는 부분에서 그는 이런 주문을 했다. “무언가(無言歌), 가사가 없는 노래들도 있죠. 그렇다면 이건, 가사가 아주아주 많은 노래입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는 설명 없이, 그의 의도가 오케스트라에 단박에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8분의 6박자 춤곡의 시작을 알리는 트럼펫의 팡파레에는 이런 주문을 했다. “이전까지 ‘이게 맞나 아닌가, 이래도 되나 저래야 하나’ 하던 음악에 당신들이 여기서 이렇게 선언하는 겁니다. ‘This is it!’” 하지만 그의 진정한 마법은 다른 곳에 있는 듯 했다. 프렌치혼의 솔로가 나오는 부분이었다. 로테르담 필하모닉의 프렌치혼 주자는 유럽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대가. 그의 솔로가 시작되고 몇 마디가 흐르자 그가 지휘봉으로 보면대를 치며 음악을 끊는 거다. “아니, 당신이 모든 걸 다 망치고 있잖아.” 일순간에 정적이 흘렀다. 그가 말을 이었다. “너무 아름답잖아요!” 모두가 소리내어 웃었다. 백명 가까운 사람을 들었다놨다 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동시에 그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을 잊지 않는 소프트 카리스마. 그것이야말로 이 리허설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른 사람에게서 전혀 본 적 없는 실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쯤 그와 다시 이런 리허설을 해볼 수 있을까? 그와 앞으로 몇 번을 더 같이 연주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절대로 알 수가 없으리란 것, 그것이 문제로다!

손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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