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집이 더 싸네…분양시장에 등장한 가격 역전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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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타 사러 갔다가 그랜저를 산다.’ 선루프 등 옵션 값을 고려하면 소나타와 그랜저의 가겨 차이가 크지 않은 것을 빗댄 말이다. 실제로 기본 가격은 소나타가 그랜저보다 싸지만, 소나타에 각종 옵션을 넣으면 가격이 비슷해지거나 되레 더 비싸질 수 있다. 차종별 가격 차이를 줄임으로써 윗급 차종으로 수요를 분산하기 위한 방법이다.

자동차 마케팅에 흔히 사용되던 이 방식이 요즘 아파트 분양시장에도 나타나고 있다. 층별로 분양가를 세분화한 뒤 주택형별 분양가를 역전시켜 상대적으로 수요가 적은 중형이나 대형으로 수요를 분산하기 위해서다. 주택형이 다양해지고 조망권 등이 인기를 끌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대산업개발이 30일 청약 1순위 접수를 받는 경기도 수원 광교신도시 광교 아이파크 90㎡(이하 전용면적) 1층 분양가는 5억5870만원으로, 이 아파트 84㎡ 30~48층(5억7000만~5억8000만원 선)보다 1200만~2200만원가량 싸다. 다락방이 있는 84㎡ 최상층에 비하면 3600여 만원이나 저렴하다.

대우건설이 내달 2일 청약을 받는 구리시 갈매지구의 구리 갈매 푸르지오도 마찬가지다. 이 아파트 113㎡(이하 전용면적) 1층 분양가는 99㎡ 20층 이상보다 600만원 정도가 저렴하다. 99㎡ 20층 이상이 옵션을 다 넣은 소나타라면, 113㎡ 1층은 옵션을 넣지 않은 순수 그랜저인 셈이다. 대림산업이 3일 충남 보령시 동대동에서 분양한 e편한세상 보령도 큰 집(84㎡) 저층 분양가가 작은 집(73㎡) 기준층보다 저렴했다. GS건설이 최근 부천시 옥길지구에서 내놓은 84㎡와 90㎡의 가격이 역전됐다.

그동안 주택형별 가격 차이가 거의 없거나 중소형과 중대형간 단위면적당 가격이 뒤집힌 적은 있었다. 하지만 아예 분양가가 ‘역전’된 예는 흔치 않았다. 분양마케팅회사인 미드미D&ampamp;C의 이월무 대표는 “부동산은 면적으로 가격을 정하기 때문에 아무리 저층이라도 큰 집이 작은 집보다 싸게 나오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분양가 역전이 가능해진 건 70~75㎡, 90~99㎡ 같은 이른바 ‘틈새주택’형이 등장하면서 최근 주택형별 면적 차이가 확 줄어서다. 실제로 대우건설의 구리 갈매 푸르지오 113㎡와 99㎡의 면적 차이는 불과 4㎡ 정도다. 광교 아이파크 역시 6㎡ 차이에 그친다. 틈새주택형이 등장하기 이전엔 아파트가 대개 59㎡, 84㎡, 113㎡로 주택형간 차이가 25~29㎡에 달해 가격 역전이 쉽지 않았다.

분양가 세분화도 영향을 미쳤다. 과거엔 저층, 기준층, 최상층(펜트하우스) 정도로만 분양가를 나눴지만 조망권 등을 강조하면서 최근 층별로 가격이 세분화하고 있다. e편한세상 보령 73㎡ A타입은 층·향·동별로 분양가가 제각각(총 24개로 구분)이다. 그러다 보니 층·향·동이 좋은 작은 집이 상대적으로 층·향·동이 떨어지는 큰 집보다 비싸지는 것이다. 가격 책정 때 면적 외에도 층·향·동에 대한 프리미엄을 고려한 때문이다.

수요자의 반응은 나쁘지 않다. 광교 아이파크 시행사(부동산개발회사)인 네오밸류의 최순웅 이사는 “예컨대 노부모를 모시고 있다면 기준층보다 저층을 더 선호한다”며 “실수요 입장에선 층·향·동 프리미엄을 포기하는 대신 더 큰 면적을 싸게 살 수 있어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시행·시공사 입장에선 중소형에 수요가 집중되는 것을 막을 수 있어 분양가 역전현상은 더 확산될 것 같다. 한 대형 건설업체 관계자는 “85㎡ 초과 중대형 비중이 많은 단지에 수요 분산을 위한 마케팅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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