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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공항 옆 면세 창고에서 왜 수조원대 미술품 거래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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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해 9월 룩셈부르크에 ‘보석상자’를 닮은 건물이 등장했다. 건물은 멋있지만 돌로 장식된 벽을 가시 철조망이 둘러싸 건조하고 살풍경스럽다. 흡사 군사기지처럼 보인다. 이곳을 채운 것은 무기가 아닌 미술품과 골동품, 와인 등 귀중품이다. 전 세계의 부자들이 날아와 드나드는 곳이다.

 이 건물은 스위스의 사업가이자 예술품 딜러인 이브 부비에가 5200만 유로를 들여 세운 ‘프리포트(Freeport)’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2만2000㎡ 규모에 160개의 방과 8개의 쇼룸이 있다. 첨단 보안장비를 갖춘 이 건물에는 50㎝ 두께의 금속 문이 달린 4개의 회의실이 있고 70만 병의 와인을 보관할 수 있는 4개의 서늘한 방도 갖췄다. 이뿐만 아니다. 중앙 뒷문을 열면 공항과 바로 연결된다. 공항은 고가의 미술품을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한 ‘신의 한 수’다. 육로를 이용해 운반할 때 수반되는 도난의 우려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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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포트는 면세지역에 들어선 창고다. 수출입업자가 관세를 내지 않고 물건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시작됐다. 1854년 제네바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때 프리포트에는 곡물이나 담배, 와인 등을 보관했다. 단순한 면세 보관창고였다.

 이런 프리포트가 변신하고 있다. 미술품 거래의 요지로 진화 중이다. 미술품이 투자 대상으로 주목받으며 안전하게 거래하고 보관할 수 있는 곳으로 프리포트가 활용되는 것이다. 이 변화를 이끈 인물이 바로 부비에다. 부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물품 보관과 운송을 하는 회사를 운영했다. 제네바대에서 공부하던 부비에는 겨울이면 알프스에서 스노보드 코치로 일했다. 1989년, 그의 삶을 바꿀 운명의 결정을 한다. 아버지의 사업을 특화한 것이다. 화랑과 경매회사, 박물관 등을 겨냥해 미술품 보관과 운송을 전문으로 하는 ‘내추럴 르 콜트레’를 세웠다. 제네바의 프리포트를 임대해 보관창고를 마련했다.

 미술품 보관과 운송 전문화 전략은 부비에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줬다. 미술계 주요 인사 및 수집가들과 인맥을 구축했다. 아트 딜러로서의 입지도 탄탄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하늘이 내려 준 기회였다. 사상 유례없는 초저금리 시대에 진입하자 부자들이 미술품 투자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개인의 호사 취미를 위해 그림 같은 미술품을 구매, 소장하는 데서 벗어나 미술품을 투자 자산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미술품의 투자수익률을 보여 주는 메이모제스 지수에 따르면 2003~2013년까지 미술품의 연평균 수익률은 7%로 S&P500 지수의 수익률을 앞질렀다. 상속을 위해 미술품을 사들이는 수요도 늘었다. 러시아·중동·중국 등 신흥국 부자들도 예술품 투자에 뛰어들었다. 유럽미술재단에 따르면 2003년 180억 유로이던 미술품 거래액은 2013년 470억 유로로 늘었다.

 미술품 거래는 은밀하게 이뤄진다. 거래 당사자가 노출되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작품의 손바꿈도 연줄로 연결된 딜러를 통해 이뤄진다. 컨설팅업체 ‘아트 이코노미’의 수석연구원인 클레어 맥앤드루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팔린 512억 유로 규모의 미술품 거래 중 52%가량이 개인 거래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가격의 투명성도 부족하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미술품의 가격 결정은 과학보다 예술에 가깝다”고 할 정도다. 미술품 수집가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미술품 시장은 내부 정보에 의해 거래되는 시장”이라고 말했다. 미술품 거래나 투자가 돈세탁이나 탈세의 수단이란 의혹을 사는 까닭이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룩셈부르크 프리포트의 전경(위)과 내부 모습. [유로아시아인베스트먼트]

 은밀하고 때로는 음산하게 큰돈이 오가는 미술품 거래에 프리포트는 안성맞춤이었다. 면세지역에 있는 프리포트는 세금에서 자유롭다. 매매자들에게 매력적인 장소가 된 이유다. 많은 화랑과 딜러 등이 프리포트에 사무실을 열거나 프리포트에서 거래하기 시작했다. 프리포트의 벽 안에서 물건을 보고 거래하는 서비스가 도입됐다.

 미술품이 투자 대상이 되면서 보관의 중요성도 커졌다. 프리포트는 첨단 보안시스템과 습도·온도·항균 조절설비 등 최상의 시설을 갖춰 미술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 바로 옆에 공항이 있어 미술품을 쉽게 운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보험 때문에 값비싼 미술품들을 한곳에만 보관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도 프리포트 비즈니스를 번성하게 한 이유다. RK해리슨의 미술품 보험 책임자인 필리포 구에리니 마랄디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한곳에 보관된 자산의 가치가 20억 달러가 넘을 경우 보험사가 가입을 제한하고 있다”며 “제네바 프리포트에 보관된 물품의 총액은 이미 한도의 다섯 배에 달했다”고 말했다. 새 프리포트에 대한 수요가 커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부비에는 이런 시장을 적극 파고들었다. ‘유로아시아인베스트먼트’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영토 확장에 나섰다. 2010년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프리포트를 열었다. 3만㎡의 규모에 첨단 설비를 갖췄다. 현재 세계적인 경매회사 크리스티가 전 층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 9월에는 룩셈부르크에 프리포트를 열었다.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건립을 추진 중인 프리포트와 관련한 자문도 했다.

 하지만 은밀하고 불투명한 거래를 하다 보면 잡음도 일어나게 된다. 부비에는 지난 2월 모나코에서 가격 조작과 돈세탁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그의 고객인 러시아의 재벌이자 AS 모나코 구단주인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의 고발 때문이다. 두 사람은 2003년 제네바 프리포트에서 처음 만났다. 마르크 샤갈의 그림을 사고 싶었던 리볼로블레프와 연이 닿으며 부비에가 거간꾼 역할을 맡았다. 리볼로블레프는 20억 달러 상당의 미술품 40여 점을 보유한 미술계의 큰손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간 것은 리볼로블레프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작품 ‘파란 쿠션을 베고 누워 있는 여인의 누드’를 비싸게 사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다. 리볼로블레프는 부비에를 통해 한 프리포트에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을 1억1180만 달러를 주고 손에 넣었다. 그러다 우연히 헤지펀드 SAC캐피털의 스티브 코언 회장이 이 그림을 9350만 달러에 팔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리볼로블레프는 부비에가 1830만 달러를 떼먹었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신뢰는 박살 났고 두 사람은 법정에서 맞서고 있다.

 리볼로블레프는 부비에가 추상표현주의의 대표 화가 마크 로스코의 그림 ‘No 6(보라, 초록 그리고 빨강)’의 값(1억4000만 유로)도 부풀려 사기를 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부비에는 “대리인이 아니라 딜러로 거래한 만큼 좋은 가격에 작품을 사서 좋은 가격에 팔아 차익을 남긴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FT는 “억만장자와 딜러의 대립은 프리포트에서 이뤄지는 미술품 거래 중 일부가 은밀하고 불투명하게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 준 사례”라고 보도했다.

 불시의 일격에도 ‘프리포트의 왕’은 포기하지 않을 태세다. 1000만 유로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부비에는 명예 회복을 다짐하며 소송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의지도 불태우고 있다. 그의 다음 행선지는 두바이 프리포트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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