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국민안전처·보건복지부 “공식 재난방송 불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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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대응을 총괄하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안전처가 지상파 방송과 종합편성채널, 보도전문채널을 통한 공식적인 재난 방송 실시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방송통신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지난 3일, 양 부처에 재난 방송의 실시 여부를 물었으나 “지금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 공식 재난 방송은 필요하지 않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전했다.

지난 11일에는 미래창조과학부 주관으로 중앙재난방송협의회가 열렸지만, 이때도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참석하지 않았다. 재난안전관리법 상 의무 참석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다.

보도를 편성하는 방송사는 방송통신기본법에 따라 국가 재난 상황에서 일사분란하게 재난 방송을 실시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법적인 ‘재난’으로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각 방송사가 자체적으로 보도를 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의 불인정으로 각종 오보와 루머가 난무하고, 정부와 각 방송사를 연결하는 ‘재난방송 온라인시스템’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시스템을 통하면 정부가 ‘피해 현황’, ‘예방 수칙’, ‘자가 격리자 당부사항’ 등 각종 정보를 200여 개 방송사로 동시에 전파할 수 있다. 또 자동 자막 송출시스템을 활용해 방송사가 따로 작업을 하지 않아도 정부 상황실에서 즉시 TV 화면에 자막을 띄울 수 있다.

보건복지부는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재난 방송을 실시하겠다는 입장이다. 섣불리 정부가 ‘재난’ 상황을 인정했다가는 오히려 국민 혼란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문형표 장관도 “추가 감염이 모두 병원 내에서 이뤄져 현재는 ‘주의’ 단계(재난 경보 매뉴얼은 ‘관심-주의-경계-심각’ 4단계)”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최경환 부총리는 “심각 단계에 준해서 총력 대응을 하겠다”고 밝히는 등 엇갈린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는 “국민의 자발적인 협조가 중요한 상황에서 정부가 신속히 재난방송을 실시하지 않아서 피해를 키웠다”고 말했다. 이어 “재난방송을 공식으로 하게 되면 국가 신인도가 떨어질 수 있다고 하는데, 국민 안전보다 정치적인 계산을 앞세운 결과”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재난 방송 실시를 공식화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이유도 있다. 재난안전관리법 제 3조는 사회 재난 중 하나로 감염병을 명시했다. 그런데 메르스는 현재 법정 감염병이 아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필요에 따라 감염병으로 긴급 지정할 수도 있지만, 아직 검토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염병 위기 경보의 어느 단계에서 재난방송을 실시해야 하는지도 정해져 있지 않다.

기존의 재난 대응 체계가 태풍이나 지진 등 자연적인 재해 위주로만 준비됐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 재난의 경우 현재 시스템에서는 주무 장관의 판단에 따라 이뤄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어서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봉지욱 기자 bongga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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