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삶을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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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어떤 행위가 동기도 좋고 결과도 좋다면 더 무엇을 바랄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남의 동기를 쉽사리 가늠할 도리가 없고 행위의 결과도 행위가 끝난 다음에야 그 가치를 비로소 판가름할 수있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자들은 행위의 결과를 강조하며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많은 행복을 가져왔느냐에 따라 올바른 행위가 될 수도 있고 그릇된 행위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예를들어 「벤담」(Jeremy Bentham)에 의하면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 밑에 두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모두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려는 본능 혹은 자연적인 성품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인간의 행위를 밝히는 윤리의 법칙이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른바 「공리성의 원리」를 내놓는다. 『모든 행위를 그 이익에 관계된 사람들의 행복을 늘리는 경향을 가졌는지 혹은 줄이는 경향을 가졌는지에 따라서 받아들이기도 하고 안받아들이기도 하는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을 얻는데 있고 행복은 곧 쾌락을 얼마나 많이 차지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는 「벤담」은 마침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도덕작 이상을 제시한다.
각자가 자기 자신만의 행복이나 쾌락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사람, 혹은 사회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킬수 있을때 우리는 바람직한 인간이 될수있고 우리의 행위 또한 선하고 올바른 것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각자의 행위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얼마만큼 이바지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고 하는것이 「벤담」을 위시한 공리주의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공리주의가 윤리학에서 중요시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것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오랜 대립을 쾌락주의의 원리위에서 해결해보고자 한데 있다. 예로부터 인간의 천성은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기 마련이라는 것이 통념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기적인 사람은 덕이 없고 이타적인 사람만이 도덕적으로 칭송받을수 있을것으로 여겨져 왔다.
여기서 쾌락주의와 이기주의가 긴밀한 관계를 맺게되는데, 그 이유는 쾌락이란 결국 나 혼자 경험하는 주관적 느낌으로서 쾌락만이 선한 것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나로서 느낄수없는 남의 쾌락을 존중해야 할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담」은 진정한 쾌락주의자라면 소위 「쾌락주의의 역리」를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사회안에서 생활하는 개인들이 각자 자기의 쾌락만을 추구할때 서로의 이해는 날카롭게 대립되기 마련이고 사회는 질서를 잃게되며 결국은 아무도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뿐 아니라 오히려 쾌락의 반대인 고통과 불행속에 자기 자신을 던져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벤담」은 이러한 종류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을 괘락주의자가 아니라 「자기파멸주의자」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수 있다.
먼저가려고 교통규칙을 함부로 어기는 각종 차량의 운전사들, 법의 헛점이나 지위를 이용하여 축재에 여념이 없는 무리들, 남을 속이거나 비방해가면서까지 나의 명예나 권력을 확보해보려는 파렴치한들. 이들은 모두 진정한 이기주의자이거나 쾌락주의자들이기 보다는 자기의 무덤을 스스로 파고있는 파멸주의자들인 동시에 사회전체를 공동묘지로 만들려고 발버둥치는 폭도들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벤담」에 의하면 진정한 쾌락주의자이려면 먼저 공리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그는 개인의 행복과 그 개인이 속하는 사회 전체의 행복이 궁극적으로 일치한다는 가정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가정 아래서 그는 사회전체가 향유하는 행복, 혹은 쾌락이 최대량에 달하도록 모두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결론에 이른다.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 이라는 공리주의의 이상은 이렇게해서 도출된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과연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가져올것인지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이 점이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 행동이나 정책, 혹은 법규라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미명하에 무조건 정당화 될 우려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미명하에 독재나 탄압이 함부로 자행될 경우 공리주의자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무슨뜻인가. 그것은 「최대다수」의 행복을 의미하는가, 혹은 다수의 「최대행복」을 의미하는가. 만약 행복한 사람의 숫자에 역점을 두면 다삭의 횡포를 감수해야하고,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의 양에만 신경을 쓰면 무고한 사람을 처형해서라도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일단 확보하고 보자는 사고방식을 정당화할수도 있다. 과연 어느것이 공리주의자들이 진정으로 실현해보고자 하는 윤리적 이상인가. 「벤담」 자신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명확한 해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행위의 결과만을 윤리적 가치의 척도로 삼는 한 아마 아무도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좋은 동기나 의도를 가져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높은 인격을 쌓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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