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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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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도쿄 특파원

모로하시 마사히로(諸橋正弘) 전 사장님. 닷새 전 작별전화를 드렸을 때 눈물이 나오는 걸 참느라 힘들었습니다. 도쿄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모레 새로운 임지로 떠날 저에게 사장님은 “폐를 끼쳐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46분 아키타(秋田)현 다카시미즈(高淸水) 주조 공장. 공장 견학 중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지진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진원지 도호쿠(東北)지방에서 말이죠. 모두가 암흑 속에 밤을 새웠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사장님은 피해를 본 공장으로 가지 않고 저희 일행에게 오셨습니다. 집에서 밤새 만드셨다는 삼각김밥이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도 동분서주하며 대형버스를 구해주신 건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며 예비기사 분까지 수배해 주셨죠. 그 곧음과 배려, 따뜻함에 모두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폐를 끼쳤다니요. 사장님은 은인입니다.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 도쿄대 전 총장님. 부임 후 인터뷰 때 “한·일이 진정한 화해를 하는 건 (전후) 한 세기(100년)는 지나야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두 달 후면 전후 70년. 이제 어렴풋이 총장님의 말뜻을 알 것 같습니다. 희망의 등불은 결국 양국 젊은이입니다. 지난 1일 본지와 닛케이의 공동 여론조사 결과 “상대방 국가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는 응답이 더 많았던 건 양국 모두 20대가 유일했습니다. 한·일 관계가 사상 최악이라고 불리는 이 시점에 왜 이들만 달랐을까요. 문화와 청소년 교류의 힘입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상대국 친구를 사귀고 ‘긍정의 경험’을 축적하면 이렇게 달라집니다. 양국 공히 이들이 40~50대가 돼 사회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하고 그 DNA를 젊은 세대가 이어가는 날을 갈망합니다. 메르스의 공포 속에서도 13~14일 동방신기 서울 공연을 보러 정기편 14대, 전세기 5대를 꽉 채운, 젊은 그 힘을 전 믿습니다.

 나루히토(德仁) 황태자님. 기회가 되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전 양국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선 일본 총리가 아닌 황실이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울림의 차원이 다릅니다. 부친(천황)의 방한에는 현실적 한계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미래의 아이콘인 황태자께서 한국을 방문하시면 어떨지요. 비교적 쉬울 겁니다. 정치적 색채를 배제하고 천황가의 모계 혈통인 백제의 백마강에서 한국·일본의 10~20대 젊은이들과 어울려 비올라를 연주하시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그걸 보며 우리 모두 새로운 한·일 관계 50년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요. 역사는 용단에서 시작됩니다.

 길다면 길었던 12년이었습니다. 띠가 한번 도는 세월 동안 숱한 일들을 겪었습니다. 이삿짐을 챙기며 세어 보니 그동안의 취재수첩이 77권에 달합니다. 그 안에는 일본에 대한 애증이 교차합니다. 하지만 이제 애정만 갖고 떠나렵니다. 여러분, 감사했습니다. 사요나라.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