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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위험물질 관리, 믿어도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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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복
이상복 기자 중앙일보 워싱턴특파원
이상복
워싱턴특파원

메르스 광풍에 밀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지만 미국의 탄저균 배달 사고는 여러모로 찜찜한 구석이 많다. 미군이 치명적인 생화학 무기를 사전 협의 없이 한국에서 실험했다는 부분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더 치명적인 독성물질도 들여왔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역시 이걸 논하자는 건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 정부가 책임의식을 갖고 미국과 따져야 할 사안이다. 내가 걱정하는 건 미국 내에서 위험 물질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느냐는 근원적 차원이다.

 미군 연구소가 살아 있는 탄저균을 여기저기 잘못 발송한 이번 사건은 그야말로 ‘역대급’ 사고라고 생각한다. 무려 10년에 걸쳐 70개 가까운 연구소와 군기지에 생(生)탄저균이 배달됐는데도 최근 한 연구소의 신고 전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배달 사고가 일어난 장소는 조사가 진행될수록 빠르게 늘고 있다. 한 번에 사태파악이 안 될 정도로 평소 관리가 소홀했다는 의미도 된다. 미 국방부는 살균 처리 과정의 문제는 있었지만 사람의 실수는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균 농도가 낮아 생명에 위협이 안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하지만 모두 말장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불행 중 다행’의 문제일 수는 있어도 불행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미국 입장에서 탄저균은 악몽 같은 기억과 동일시된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탄저균이 묻은 편지가 유명인사들에게 배달돼 5명이 숨지고 17명이 감염됐다. 범인은 육군 생화학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이런 탄저균이 10년간 무방비 상태로, 그것도 민간 배송업체 손으로 배달된 장면을 생각하면 아찔하기 짝이 없다. 다른 생화학 무기들은 안전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번 사건은 지난해 미군 핵무기 부대 실태 조사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미 국방부의 대대적인 감찰로 지휘관 10여 명이 옷을 벗었다. 노스다코타주의 한 부대에선 핵미사일 통제 권한을 가진 장교 17명이 암호조차 몰라 자격을 박탈당했다. 음주 난동과 도박을 이유로 해임된 장성도 있었다.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핵무기 관련 시험에선 대대적인 부정행위가 이뤄진 사실도 확인됐다. 일부 장교는 불법 마약을 소지한 혐의도 받았다. 척 헤이글 당시 국방장관이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개탄할 정도였다. 미국 언론들은 냉전이 끝나고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사실상 없어지면서 군부대의 기강해이가 빠르게 번져갔다고 지적했다. 탄저균 관리 소홀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듯하다.

 미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군사 초강대국이다. 경찰국가라는 별칭처럼 세계 각국의 안보 현안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에서 화학무기 사용을 레드 라인(금지선)으로 설정한 것도 미국이다. 미국은 핵무기는 물론 생화학 무기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그래도 우리가 걱정하지 않는 건 공격이 아닌 방어용이고,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 신뢰가 흔들린다면 또 다른 비극이 생겨날 수도 있다.

이상복 워싱턴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