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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 「유소기·팽덕회」비참한 최후 공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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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경AP=연합】중공의 문화혁명당시 모택동에 의해 숙청된 전국가주석 유소기와 국방부장 팽덕회는 혼수상태와 반신불수상태에서 각각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한때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명됐다가 숙청된 유소기는 치료조차 거부된 가운데 혼수상태에 빠져 감옥으로 개조된 개봉시의 한 은행건물에서 지난69년11월12일 최후를마쳤다고 문회보가 23일 공개했다.
또 대약진운동의 반대로 숙청된 팽덕회는 「고문으로 인한 반신불수상태」에서 지난74년11월29일 북경에서 사망했다고 중공당기관지 인민일보가 그의 조카딸의 글을 통해 밝혔다.
지난66년부터 76년까지 중공전역을 휩쓴 문화혁명기간중 모의 희생물이 된 유소기와 팽덕회는 사후인 78년과80년에 오랜 친구인 등소평에 의해 각각 복권됐다.
상해에서 발행되는 문회보는 유소기가 말년에 겪은 비참한 옥중생활을 그린 한 단행본을 요약해 「정자파 제1호」「반역자」로 몰린 유의최후의 모습을 소개했다.
이 기사는 유소기가 67년부터 혹독한 대우와 비판을받기 시작, 68년에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채 음식조차 혼자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나 『어느 누구도 그에게 필요한 음식물을 갖다 줄 수가 없었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특히 유소기는건강이 악화되면서 때로는 국물로 이를 닦기도 했으며 자해행위방지를 위해 다리에 족쇄가 채위졌다면서 의사들이 폐질환·당뇨병·고혈압을 진단, 병원으로 이송할 것을 건의했으나 거부됐다고 말했다.
그는 3개월동안 무려 5차례나 사경을 헤맸으며 68년10월11일부터 사망할때까지 코를 통해 류브로 음식을 공급받았다.
마침내 그는 69년10월17일의사1명과 간호원4명이 동행한 가운데 비행기를 이용,비밀리에 중부지방인 개봉시로 옮겨져 2층높이의 벽으로 둘러싸인 난시가의 전진젱은행에 수감됐다.
개봉시에서 불과 26일동안산 그는 갖은 박해끝에 69년11월12일 71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튿날인 13일 상오1시 비밀리에 화장됐다.
그의 유해는 지난80년5월 장례식을 치르면서 소원대로바다에 뿌려졌다.
또 1898년 태생인 팽덕회는 한국전쟁의 중공측 휴전서명자로 국방부장까지 지냈으나 59년 노산에서 열린 당회의에서 대약진운동에 반대했다가 반정부군사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숙청됐다.
그는 당초에 말단 관직을 맡았으나 문혁기간중 북경 서쪽에 있는 단칸방에 연금됐다.
팽덕회의 조카딸인 「펭강」은 76세로 사망한 그의 1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인민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지난74년10월23일 사촌 「캄·바이」와함께 병상을 찾아갔을때 숨을거두면서 남겨놓은 회한의 말을 잊을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삼촌은 심한 고문으로 인해 이미 반신불수상태였으며 갑자기 내손을 잡은후「죽기가 두렵다. 내가 죽은후 네아버지와 함께 묻힐수 있을지 모르겠다. 네아버지도 위대한 혁명전사인데 그이름을 더럽힐까 두렵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했다.
한편 그녀는 지난60년 팽에게 대약진운동을 반대한 이유를 묻자 『공산주의자는 책임을 질줄 알아야 한다』면서『관직을 잃고 당에서 축출되거나 투옥된후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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