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1) 조국의 불우학생돕는 목수 남익희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말씀을 그대로 실천해온 교민이 있다.
캐나다 터론토시에서 목수일을 하는 남익희씨(46). 그자신 넉넉하게 살지 못하면서 8년동안 조국의 불우한 학생들을 찾아 남몰래 돕고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선행이 언제 시작됐으며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학생이 혜택을 받았는지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족에게는 커녕 멀리 찾아간 기자에게조차도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선뜻 해주려하지 않았다. 하는수 없이 그를 아는 교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취재를 했으나 주변에서도 어렴풋이 알고있을 뿐이었다.
여러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남씨가 처음으로 어린 학생들을 돕기 시작한 것은 지난 70년. 당시 서울시경 순찰대소속 순경으로 근무하던 그는 여름휴가때 우연히 전남순천부근의 산골마을에 들렀다가 가정형편으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 3명을 알게됐다.

<송금 늦어져 화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남씨는 어릴때 처지가 비슷했던 이들을 도와줄수가 없을까하고 생각했다.
매달 자신의 용돈을 아껴 신발과 노트 등을 살수 있는 적은 액수의 돈을 어린학생들 몰래 이들의 부모에게 송금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민학교 5학년과 4학년이던 어린학생들은 남씨의 도움으로 고등학교까지 마칠수 있었다.
76년2월 거의 맨손으로 캐나다로 이민한 남씨는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그러나 고향인 청주의 누이동생을 통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남씨의 송금은 계속됐다.
남을돕는 일이 그리 쉬운것만은 아니었다. 78년봄 남씨부부는 송금문제로 부부싸움까지 했다.
남씨의 부인 장경순씨(42)가 남씨대신 송금하기로한 수표를 며칠동안 갖고있었던 것.
『송금이 늦으면 그애들이 굶지않느냐. 우리자식이 굶고있다고 생각해보라』고 화를 낸 남씨의 손이 부인의 뺨위로 날았다.
이날의 싸움은 부인의 사과로 쉽게 끝났지만 그 내막이 조금이나마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됐다고 당시 남씨의 직장동료 김의수씨(42)는 말했다.
사이좋기로 이름난 남씨부부의 싸움은 곧 소문이 났고 이웃들의 성가신 추궁에 남씨의 선행일부가 공개됐던 것.
태권도 공인4단에 유도1단의 무술실력이 말해주듯 중키에 단단한 체구를 가진 그는 자신의 별명이 「베트콩」으로 함께 사이드카를 타던 시경의 동료사이에 꽤 악명 높았었다며 웃었다. 경찰시절 힘든 일을 도맡아 하던 그는 캐나다에 와서도 몸으로 부딪치는 직업을 택했다.
터론토시 한인회사무실 내부공사일을 맡아 열심히 대패질을 하다 기자를 만난 그는 『목수가 무슨 수로 남을 돕겠느냐』고 시치미를 떼며 취재에 응하려들지 않았다. 주일을 항상 교회에서 보내는 그는 자신의 선행이 알려지는 것이 성경말씀에도 어긋난다고 믿고있는것 같았다. 그에 관한 얘기는 몇몇 교민들에게 수소문해 듣는수 밖에 없었다.

<복권 10만불 당첨>
남씨가 시작한 이민생활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76년 기동대 순경직을 떠나 처남초청으로 캐나다로 온 남씨는 슈퍼마키트점원·용접공·양복공장의 프레스맨등 닥치는대로 생활전선을 헤맸다.
건강한 그에게도 프레스기계로 양복을 다리는 일은 고역이었다.
시간당 7달러를 받는 이작업은 하루에 1만번씩 발로 기계를 밟는것으로 집으로 돌아갈때는 자동차브레이크 밟을힘도 없을 정도였다. 잠자리에서 옆사람을 걷어찬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생활비와 함께 조국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보낼 돈을 벌기위해 그는 5년간 야간 지렁이잡이도 했다.
조명장치가된 모자를 쓰고 시골농장의 지렁이밭에서 맨손으로 잡아 깡통에 채우는 이 일은 수입은 좋은 편이지만 누구도 오래 계속하지 못했다. 지렁이와의 싸움이라고 표현해야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씨는 하룻밤에 3천마리를 잡아 60∼70달러를 벌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남씨부부에게 큰 행운이 찾아봤다. 79년11월 온타리오주정부가 발행한 복권이 당첨돼 10만달러를 타게된 것. 그는 즉석에서 1만달러를 불우이웃돕기자금으로 그가 다니던 교회에 내놓았다. 나머지로 조그마한 보금자리도 마련할수 있었다.
남씨는 현재 시간당 17달러를 받는 목수로 일하면서 2년전부터 한국인 2명, 캐나다인 2명을 둔 조그마한 목공소를 경영하고 있다. 그의 착한 마음씨는 회사경영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종업원 강갑철씨(33)는 『남씨 목공소는 월급이 따로 없다. 수익을 사원들과 똑같이 나누기 때문에 직원들이 모두 자기일처럼 하고있다』고 했다.

<반드시 익명선행>
남씨는 현재 7명의 학생들을 보살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0년 당시의 국민학생들은 군복무도 마치고 전남과 서울의 대학에 재학중이라는 이야기다.
남씨는 이밖에도 화전민출신 등 어려운 학생들에게 매달 3백여달러씩을 보내고 있으며 각종 재해가 있을때마다 성금을 잊지 않는다.
이 모든 선행을 그는 익명으로 하고 있어 그가 누구에게 얼마의 도움을 주었는지는 그자신외에 확인할 길이 없다. 『내자신이나 나의 가족이 굶으면서 학생들을 도운게 아닙니다. 도대체 내세울 일이 못됩니다.』 끈길기게 입을 열지않는 남씨를 기자의 능력으로는 더이상 설득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경제력이 허락하면 농장을 구입, 넓고 풍요한 캐나다땅에 어렵게 사는 고국의 동포들을 많이 초청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 남씨는 자신은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지 못했으나 고등학교에 다니는 1남2녀의 자녀들이 『다행히 전부 학년전체 수석을 다투면서 상장을 휩쓸어온다』며 벽에 걸린 상장들을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터론토=정봉환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