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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기 위해 사랑을 포기한 여인의 당당함이여!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 조국애와 실연의 복수심, 집요한 사랑 위해… ‘보호받는 여성상’ 버리고 ‘화신’이 되어 운명에 맞서다

예리한 칼로 남자의 목을 자르는 여인의 표정에서 혐오감과 결연한 의지가 동시에 느껴진다. 카라바지오가 그린 유디트는 앳된 여인의 매력과 장수의 용맹함을 모두 지닌 여성성을 뛰어넘은 여성의 매력이 돋보인다.

여성의 패션을 말할 때 군복스타일의 ‘밀리터리룩(military look)’, 소년 같은 느낌의 ‘보이시룩(boyish look)’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었다. 여성들도 가끔 남성적인 느낌의 옷을 입어보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블리룩(lovely look)’이라는 것은 단번에 이해되지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것일까. 러블리룩의 이미지들을 찾아보니, 레이스가 달리거나 리본이 달린 옷들, 꽃무늬나 물방울무늬가 찍힌 원피스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좀 더 ‘여성스럽고, 보호해주고 싶고, 귀여워 보이는’ 옷들을 러블리룩 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연 ‘러블리(lovely)’라는 뜻은 무엇일까? 무엇이 여성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일단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위협하는 당당함은 ‘러블리’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은 좋지만, 일에만 푹 빠져 집안을 돌볼 시간도 여유도 없는 여자는 ‘러블리’할 수가 없다. 사랑스러운 캐릭터의 대명사인 미국드라마 <프렌즈>의 주인공 레이첼(제니퍼 애니스톤)은 끝없이 실수하고 그때마다 좌절하지만 여성에게조차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그녀의 ‘귀여운 모자람’과 ‘눈감아주고 싶은 백치미’는 전 세계인에게 ‘러블리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 그녀처럼 사랑스러운 여성은 주변에 언제나 도와주려는 친구, 그 실수를 메워주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프렌즈>를 보며 ‘레이첼처럼 러블리한 사람이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번 일에 빠지면 주변을 둘러보기는커녕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에 부칠 정도가 되어버린다. 나 또한 실수를 곧잘 하지만 남들이 도와주는 것은 극도로 싫어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움’이 여성의 미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주어진 악조건과 싸우는 여인들에게서 매혹을 느낀다. 나는 ‘프렌들리(friendly)’한 것은 좋지만 ‘러블리(lovely)’한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다정한 것은 좋지만 애정을 갈구하는 눈빛은 고통스럽다. 나는 ‘러블리’함과 거리가 먼 사람들을 사랑한다.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조금은 ‘멋대가리 없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마음속에서는 ‘사랑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여인들이 항상 마음속 깊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남들이 싫어할까 봐, 나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까 봐 되지 못했던,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또 하나의 자아가 내 안에는 오랫동안 숨어 있었다. 나는 ‘러블리’하지 못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더욱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용감한 여성들을 그린 그림들에 늘 매료되었다. 그 용감함은 배우고 싶지만, 그 분노와 고통만은 차마 닮고 싶지 않았던 여인들의 역사. 그 첫 번째 장면에 적장(敵將)을 유혹해 그의 목을 베는 놀라운 여인 유디트가 있다.

여인의 매력과 전사의 용맹을 갖춘 유디트

1. 젠틸레스키의 그림에 나타난 유디트의 표정은 공포에 질린 홀로페르네스의 표정과 극적으로 대비되며 강한 여인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성폭행을 당했던 아픈 경험이 있는 젠틸레스키의 분노가 투영된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 메데아는 조국마저 버리고 사랑을 갈구했던 자신을 버린 남편을 향한 복수의 화신이다. 목에 걸린 시뻘건 목걸이가 광기 어린 표정을 더욱 섬뜩하게 한다.

카라바지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598~99

카라바지오(1571~1601)가 그린 유디트(Judith)는 이제 갓 십대를 벗어난 듯한 연분홍빛 볼과 순진한 눈빛을 한 젊은 아가씨다. 과부였던 유디트는 처음에는 아시리아의 용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고, 그녀의 유혹에 속아 넘어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쳐낸다. 여인의 매력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전사의 용맹으로 ‘장군’을 참수한 그녀의 용기는 수많은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의 몸에서 직접 칼을 빼내 목을 내리친다. 구약 외경 중의 하나인 <유딧서> 13장에는 그녀가 적진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그의 침대를 향해 다가간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카락을 틀어쥐고 말했다. 신이시여, 저를 강하게 만드소서! 이윽고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목을 두 번 내려치고, 그의 머리를 몸에서 떼어냈다.”

유디트의 모습을 그린 화가는 매우 많았다. 도나텔로, 보티첼리, 만테냐, 조르조네, 크라나흐, 젠틸레스키, 티치아노, 레브란트, 루벤스 등 수많은 화가가 유디트를 뮤즈로 삼았다. 카라바지오는 유디트의 이야기 중 가장 극적인 장면, 즉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바로 그 순간을 그려낸다. 카라바지오 이전의 화가들이 유디트가 이미 적장의 목을 벤 후 그 목을 바라보는 승리와 도취의 순간을 그린 데 반해, 카라바지오는 가장 드라마틱한 폭력의 현장을 그려냄으로써 이후 화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유디트의 표정에는 ‘반드시 이 사람을 없애야 한다’는 결연함과 동시에 ‘이 일은 정말 끔찍하구나!’하는 혐오감이 동시에 서려 있다. 마치 동영상을 보는 것 같은 생생한 섬뜩함이 유디트의 앳되고 여린 얼굴과 대비되어 더욱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낸다.

구스타브 클림트, <유디트>, 1901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는 이미 ‘거사’를 마친 후 그녀의 득의양양한 미소를 섬뜩한 신비의 정조로 그려낸다. 클림트는 ‘죽이려는 힘’과 ‘살려는 힘’이 부딪치는 유혈 낭자한 사건의 중심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을 마친 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실제로 적장의 목을 치러 목숨을 걸고 떠난 유디트가 이렇게 화려한 장신구를 걸쳤을 가능성은 낮지만, 클림트의 유디트는 금빛 액세서리들에 둘러싸여 마치 거대한 금빛 회오리를 휘감고 있는 듯 장식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클림트가 그려낸 유디트는 마치 목에 깁스를 한 것처럼 당당히 고개를 쳐든 모습이다. 그에 비해 홀로페르네스의 목은 이미 생명의 흔적이 사라져 차갑게 사물화된 모습이다. 당당히 고개를 수직으로 들어올리고 ‘나는 승리했다’는 표정으로 관객을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유디트와 달리, 홀로페르네스는 눈을 감은 채 바닥을 향하고 있다. 클림트의 유디트는 섬뜩한 미소와 화려한 관능을 동시에 뿜어내며 신비의 오라에 휩싸여 있다.

“난 저 끔찍한 자의 발아래 엎드려서는 날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신음하듯 절규했거든. 그자가 나의 영혼의 두려움에서 나오는 절규를 들어주었더라면, 난 절대로, 절대로 그를… 하지만 그의 대답은 결국 내 가슴을 풀어헤치고 내 젖가슴을 칭찬해대는 거였지. 그자가 나에게 입을 맞추었을 때 난 그의 입술을 깨물었지. 그러자 그는 비웃듯이 “네 열정을 좀 누그러뜨려라. 너무 앞서가는군!”이라고 말하더군. (…) 결국 나의 존엄성이 상실되면서 존재의 권리를 잃어버렸지. 내가 그의 칼로 내 잃어버린 존재의 권리를 다시 쟁취해야겠어! 날 위해 기도해다오! 지금 그 일을 하겠어!”

-프리드리히 헤벨, <유디트>, 김영목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 110~111쪽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614~20

젠틸레스키(1593~1652)의 유디트는 카라바지오보다 한층 더 생생하다. 카라바지오의 그림에서 피가 솟구쳐 오르는 장면이 다소 작위적인 각도로 그려져 있는 것에 비해 젠틸레스키의 그림은 훨씬 섬세한 현장감과 역동성이 느껴진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카라바지오의 유디트가 지닌 두려움이나 망설임, 혐오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반드시 처단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각오만이 올곧게 번득인다. 유디트의 사투를 돕는 시녀의 표정에는 숨죽인 공포가 서려 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홀로페르네스가 시녀의 목덜미를 그러쥐고 있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 그림은 여성화가였던 젠틸레스키의 생애와 연관시켜볼 때 더욱 깊은 의미로 번져나간다. 젠틸레스키는 끔찍하게 성폭행을 당한 기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이 그림 속의 유디트가 바로 젠틸레스키의 모습이고 죽어가는 홀로페르네스가 바로 자신을 강간한 남자였다는 것이다. 젠틸레스키의 전기를 쓴 작가 매리 개러드는 이 그림을 일컬어 “예술가의 매우 사적인 카타르시스의 표현”이라고 묘사했다. 유디트는 어쩌면 화가의 억압된 분노를 표출하는 대리자였을지도 모른다.

복수의 화신이 되어버린 여인

남편의 복수를 위해 두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메데아의 분노는 자신을 이방인으로 홀대하는 코린토스 사회를 향한 저항이기도 하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이아손과 메데아>, 1907

유디트가 조국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으로 그려지는 반면, 메데아는 복수의 화신이자 질투에 눈이 먼 패륜아로 그려지곤 한다. 메데아는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간 남편에게 복수를 한 것도 모자라 자신이 낳은 아이까지 죽인 비극의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아>에서 그녀는 한 남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조국을 버리고, 그 남자가 자신을 버리자 복수의 정념에 불타 그의 새로운 아내는 물론 자신이 낳은 아이들까지 죽이는 인륜의 파괴자로 그려진다. 하지만 잠시 ‘행위의 결과’ 이전에 ‘행위의 동기’를 살펴보자. 남편 이아손이 메데아에게 한 행동을 돌이켜보면, 메데아의 분노와 좌절감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은 물론 조국의 이익까지 다 버린 채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손에 넣어 아르고호의 눈부신 영광을 쟁취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메데아가 없었다면 이아손은 영웅의 칭호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아손은 그녀를 버리고 더 큰 권력과 재산을 얻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아내 글라우케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아이들까지 저버린 채 그녀를 코린토스에서 추방하려 한다. 메데아는 이미 친정을 저버리고 ‘사랑’만을 선택한 처지라, 머나먼 낯선 땅 코린토스에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워터하우스(1849~1917)의 <이아손과 메데아>는 아직 메데아 커플이 서로를 향해 증오의 칼날을 드리우기 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메데아는 자신의 주술과 마력을 이용해 사랑하는 이아손을 도우려고 하고 있다. 워터하우스는 메데아의 뛰어난 능력과 남다른 침착함을 서늘하게 포착해낸다. 사실 메데아는 정신착란 상태에서 복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르는 짓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아>에서는 ‘자신이 저지르려는 행동’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메데아의 독백이 소름 끼치게 묘사된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는 것인지. 그러나 아무리 알고 있다 하더라도 타오르는 분노가 그보다 더 강하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무서운 재앙이라는 것을 알고도 남지만.”

프레드릭 샌디스, <메데아>, 1868

프레드릭 샌디스(1829~1904)의 <메데아>는 분노를 넘어 광기에 사로잡힌 여인의 넋 잃은 표정을 묘사한다. 시뻘건 선지피의 색깔을 떠올리게 하는 섬뜩한 목걸이는 메데아가 감당해야 했을 고통과 분노의 온도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메데아는 자신의 신분과 조국, 가족과 친지의 기대마저 모두 저버리고 한 남자의 사랑을 선택했다. 주술사이기도 했던 메데아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이아손이 황금양털의 과업을 완수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지만, ‘이방인 아내’를 두게 된 이아손의 사랑은 서서히 식어간다. 메데아를 버리고, 그는 ‘왕실의 혈통과 막대한 재산’에 대한 탐욕을 숨기지 않은 채 글라우케 공주와 결혼을 해버렸다. ‘제발 코린토스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 수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메데아의 애절한 눈빛을 외면한 채, 글라우케의 아버지는 메데아와 아이들을 추방하려 한다. 더 이상 이 세상에 마음 둘 곳이 없어진 메데아는 자기 아이들에게 글라우케의 결혼을 축하하는 드레스를 배달하게 하여, 독이 묻은 드레스를 입은 글라우케가 죽도록 만든다. 메데아는 왜 이아손을 직접 죽이지 않고, 새로운 아내와 아이들을 죽게 만들었을까.

유진 들라크루아, <분노에 사로잡힌 메데아>, 1868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아는 모성애마저 저버리는 분노와 질투의 가공할 위력을 그려낸다. 남편을 죽이는 직접적인 복수를 택하지 않고, 새로운 아내와 아이들을 죽인 메데아의 결정은 ‘남편을 죽을 때까지 천천히 괴롭히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단번에 목숨을 빼앗아 짧은 고통을 주기보다 자신이 느낀 것처럼 끔찍한 고통을 너도 한번 겪어보라는 저주의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또한 에우리피데스의 해석일 것이다. 독일 작가 크리스타 볼프는 <메데아, 목소리들>에서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메데아의 사라진 목소리를 복원하려 한다. 크리스타 볼프는 메데아의 아이들도 그녀가 직접 죽인 것이 아니라 코린토스 사람들의 메데아를 향한 증오가 일으킨 비극이라고 본다. 이 작품에서 메데아는 자신을 ‘야만인’으로 대접하고, ‘이방인’으로 홀대하며, ‘주술사’라는 이유로 두려워하는 코린토스 사람들에 맞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투사로 등장한다. “코린토스 사람들은 내가 거칠다고 합니다. 저들은 여자가 자기주장을 하면 거칠다고 하지요.”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면 ‘드센 여자’, ‘매력 없는 페미니스트’라고 공격하며 온갖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이 사회에서 어쩌면 메데아는 ‘여전히 이해 받지 못하는 여성들, 여전히 사랑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원한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팜므 파탈, 여성의 덫이자 남성의 환상

1. 세례자 요한의 머리 앞에서 반라로 춤을 추는 살로메의 동작과 표정 속에는 갑갑한 궁전 생활에서 벗어나고픈 갈망이 배어 있다.
2.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난 요한의 머리 앞에서 마지막 춤사위를 벌이는 살로메의 광기 어린 격정은 자신의 사랑을 거부한 남자를 향한 구애의 몸짓이다.

구스타브 모로, <살로메>, 1876

팜므 파탈의 대명사 살로메는 이 ‘분노하는 여인들’의 계보에서 가장 매력적인 자태를 뽐낸다. 유디트가 때로는 평범한 아낙네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메데아가 아이 둘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에 반해 살로메는 항상 최고의 아름다운 자랑하는 젊디젊은 팜므 파탈로 그려지곤 한다. 신약성경에서 잠깐 등장하는 살로메의 모습을 모티브로 전무후무한 치명적인 팜므 파탈을 완성해낸 오스카 와일드(1854~1900). 오스카 와일드는 성경 속에서 희미하게만 드러나 있던 살로메의 매혹을 치명적인 유혹의 언어로 변모시킨다. 작품 초반부터 살로메는 자신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향해 쏟아지는 남성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부담스러워한다. 그중에서도 의붓아버지 헤로데왕의 시선이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다. 의붓아버지의 시선은 소름 끼치게 노골적이며, 그의 대사 또한 왕의 풍모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파렴치하다. “살로메, 이리 와서 짐과 함께 과일이나 먹자꾸나. 과일에 난 너의 사랑스런 이빨자국을 보고 싶구나. 이 과일을 조금만 베어 먹어 보려무나, 그럼 나머지는 짐이 다 먹어 치우겠노라.”

그녀의 관심을 기대하는 남성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세례자 요한뿐이다. 요한은 살로메의 어머니 헤로디아와 남편 헤로데왕의 근친상간적 결혼을 비난한 죄로 갇혀있는 상태였다. 요한은 헤로데왕이 형의 아내를 취한 것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고 헤로데왕의 탐욕에 대한 신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당당하게 예언한다. 요한은 눈엣가시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국왕은 두려움을 느낀다. 살로메는 의붓아버지의 폭정과 탐욕에 대한 혐오감이 심한 만큼, 정의에 불타는 요한의 올곧은 모습에 깊이 매료된다. 하지만 오직 신의 사랑만을 꿈꾸는 요한에게 여인의 사랑은 짐이 될 뿐이다.

요한은 살로메의 격정적인 키스를 한사코 거부하고, 요한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내던 살로메는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강렬한 감정에 가슴 졸인다. 요한은 살로메의 사랑을 거부하고, 그녀는 왕의 사랑을 거부하고, 왕비는 남편이 자신의 딸을 열망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 틈바구니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살로메다. 헤로데왕은 살로메에게 ‘춤을 춰보라’고 명령하고, 어머니는 ‘춤을 추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며, 세례자 요한은 그녀의 춤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그녀는 누구에게서도 진실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 왕은 자신의 생일에 춤을 추어만 준다면 살로메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호언장담한다. 살로메의 머릿속에는 그 순간 무엇이 스쳐 지나갔을까? 살로메는 절대로 추기 싫은 춤을 준비하면서, 그 어떤 자유도 누릴 수 없는 갑갑한 궁에서 무엇을 꿈꾸었던 것일까? 구스타브 모로의<살로메>는 춤을 추는 살로메의 아름다운 동작 속에 감춰진 냉정한 결단의 기운을 교교히 드러낸다.

구스타브 모로, <환영(幻影)>, 1876

살로메는 마치 지상에서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듯 눈부신 춤을 추어 좌중을 사로잡는다. 살로메는 의붓아버지 헤로데왕이 원하는 춤을 추어주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은쟁반에 담긴 요한의 목’이라고 선언한다. 차라리 ‘왕국의 절반을 달라고 하면 주겠다’고, 제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원일랑 거두라고 왕은 살로메를 달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어쩔 수 없이 요한의 목을 베어 은쟁반에 담아 대령하자, 살로메는 더욱 놀라운 행동을 저지른다. 이제 참혹한 시체가 되어버린 요한의 피투성이 입술에 키스를 하며 절절한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구스타브 모로의 <환영>은 이제 유령이 되어버린 요한의 목을 향해 마지막 춤의 혼을 바치려는 듯한 살로메의 광기 어린 격정이 그려져 있다.

“요한, 그대는 나를 거부했어. 아주 심한 욕을 퍼부었지, 유대의 공주, 헤로디아 왕비의 딸, 이 살로메를 마치 창녀나 음탕한 여자처럼 취급했어! 이봐요 요한, 그런데 나는 아직 살아 있고 그대는 죽어 버렸지. 그래, 그대 머리는 내 거야. 이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 요한, 그대는 내가 사랑한 단 하나뿐인 남자였어.”

-오스카 와일드, <살로메>, 동서문화사, 2012, 303쪽

프란츠 폰 슈투크, <살로메>, 1906

프란츠 폰 슈투크(1863~1928)의 <살로메>는 요한의 머리를 마치 화려한 전리품처럼 전시해놓고 광란의 춤을 추는 살로메의 격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을 오페라로 개작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는 그림 속에 등장하는 팜므 파탈의 대명사 살로메의 광기 어린 열정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오페라 속 살로메는 오스카와일드의 소설보다 한층 더 격렬한 어조로 국왕과 왕비는 물론 수많은 사람이 모인 왕궁에서 죽은 요한의 시체를 향해 애정을 표현한다. “아! 넌 네 입술에 키스를 못하게 했지, 요한? 이제 키스할 거야! 과일을 깨물듯이 네 입술을 깨물어주지. 그래, 이제 키스할 거야, 당신 입술에 말이야, 요한.”

여성성을 뛰어넘어 사랑을 갈구했던 여인들

그녀는 모두가 자신을 주목할 때 오직 요한만은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깊이 절망했다. “아아, 맞아. 내가 그를 볼 때도 그는 날 보지 못했어. 내가 그렇게 추한가? 아니야, 난 아름다워. 그런데도 그는 날 쳐다보지도 못했어. 그건 바로 날 두려워하는 거야. 내게 있는 에로스를 그는 두려워했던 거야.” 그녀가 사랑했던 것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의 그 무엇’을 보여주었던 요한의 초월적 계시였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없는 것을 정확히 소유하고 있었다. 살로메는 순수한 에로스 그 자체를, 요한은 세속을 뛰어넘는 신성한 초월의 경지를 지니고 있었다.

시몬느 드 보봐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을 ‘사랑 지상주의’의 노예로 만드는 사회의 남성중심주의를 고발했다. ‘사랑이야말로 여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라고 주장했던 남성들의 틈바구니에서 보봐르는 주고 또 주기만 하는 희생적인 사랑을 강요받는 여성들이 더 이상 ‘타자’가 아닌 ‘주체’의 자리에 설 때 변화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남자의 인생은 명성이며, 여자의 인생은 사랑”이라고 주장하며 “여자들은 끊임없이 희생하는 삶을 살 때에만 남자와 동등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발자크에 맞서, 보봐르는 이렇게 주장했다. “여자들이 자신의 나약함이 아닌 강인함을 사랑하고, 스스로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이 가능해지는 날, 그날 비로소 사랑은 남자들에게 그런 것처럼 여자들에게도 치명적인 위험이 아닌 삶의 근원이 될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정체성을 내주어야 했던 시대의 이야기 속에서 여성들에게 사랑은 여전히 치명적인 위험이었다. 메데아는 사랑 때문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었고, 유디트는 사랑을 가장해야 한 남자의 목을 벨 수 있었으며, 살로메는 사랑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한 위대한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분투했다.

이 그림들은 처음에는 자석처럼 훅 영혼을 빨아들였다가, 시간이 지나면 내 안의 깊은 슬픔을 끌어내 그녀들이 내게 감염시킨 분노와 슬픔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보도록 만들었다. 첫 느낌은 충격, 두 번째는 유혹, 세 번째는 슬픔이 된 그림들이다. 나는 이 무서운 여인들, ‘사랑스럽지 않은 여자들’에게 여전히 끌린다. 나는 ‘사랑스러운 외모와 말투’를 구사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노력하고 꿈꾸고 쟁취하여, ‘사랑’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생을 바치는 여인들의 이야기에 매혹된다. 그 첫 번째 장면에 자리하고 있는 사랑스럽지 않은, 위대하지만 어쩐지 좀 무서운 여인, 유디트가 있다. 남성들마저 벌벌 떨게 만든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로부터 시작하여 아담을 사탄의 유혹에 빠뜨린 이브, 그리고 유디트, 메데아, 살로메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은 사랑스럽지 않다. 하지만 사랑을 위해, 나아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메두사의 후예들은 오늘도 싸운다. 그녀들은 아직 이루지 못한 세상의 다른 이름이다. 여전히 이루지 못한 여성들의 뜨거운 꿈을 상징하는 욕망의 마그마다.

정여울 - 1976년생. 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과 및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침. 2004년 ‘문학동네’로 등단. 저서로는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잘있지 말아요><마음의 서재><시네필다이어리><정여울의 문학 멘토링>등이 있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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