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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나타난 태극기 휘날리며

중앙일보

입력

“우리 둘 중 한명만 살아야 한다면 그건 너야”

1950년 6월 대구역. 서울에서 생활하다 형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 이진석은 강제 징집돼 군용열차에 오른다. 동생 진석을 찾기 위해 열차에 뛰어오른 형 진태 역시 만 18세 이상 강제징집 대상이 돼 군인이 된다. 특별한 우애를 보였던 형제는 같은 소대에 배치됐고, 형 진태는 동생의 징집해제를 위해 전장을 누빈다. 본인이 공을 세우면 동생이 민간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서다. 오직 동생의 생존을 위한다는 이유 하나로 전쟁 영웅이 돼 가고 있는 진태와 잔인하고 냉정함으로 변해가는 형이 못마땅한 진석은 갈등을 겪지만 형의 마음은 언제나 동생을 위했다. 국군이 북진을 거듭하며 평양을 함락하고, 다시 후퇴하며 헤어진 형제. 형 진태는 동생을 찾기 위해 전장을 헤매고…

장동건(이진태), 원빈(진석) 주연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요 장면들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와 비슷한 사실이 현실에 나타났다.

지난 4일 오전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50 묘역에서는 생소한 풍경이 펼쳐졌다. 유해를 안장하는 작업 과정도, 비석의 모양도 달랐다. 현충원에 안장된 유해는 묘비 하나에 상석(床石) 하나로 돼 있다. 그러나 여기엔 상석 하나에 묘비 두개가 서 있었다. 땅을 판 뒤 안장하고, 그 위해 상석을 얹는게 일반적인 장례 절차였지만 이곳에선 비석 뒤쪽에서 상석밑을 향해 사선으로 땅을 파고, 유골을 넣은 뒤 다시 사선으로 흙을 넣고 잔디를 덮는 식으로 안장했다. 먼저 조성된 동생의 곁에 뒤늦게 발견된 형의 유골을 묻기 위해서였다. 현충원 관계자는 “서울 현충원은 포화상태인데다 형제를 한 곳에 묻기 위해 합장 형태로 묘지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동생 곁에 안장된 주인공은 6ㆍ25에 참전했다 전사한 고(故) 강영만 하사. 그는 전장에 나간 동생이 걱정이 돼 스스로 군인이 됐다고 한다. 49년 1월 입대해 2사단 소속으로 웅진반도 전투와 인천상륙작전, 화령장 전투등에서 맹활약 한 동생 강영안 이등상사를 챙기려는 마음이었다. 마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장동건이 동생 원빈을 보호하기 위해 군용열차에 오른 것처럼.

중공군의 공세가 한창이던 51년 1월 자원입대한 그는 동생과 다른 부대에 소속돼 함께 전투를 할 수는 없었지만 횡성전투와 호남지구 공비토벌 작전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해 무공을 세웠다. 그러나 51년 8월 19일 1만여명의 북한군ㆍ중공군과 7일 동안 치열한 고지전을 벌인 2차 노전평 전투에서 25세의 나이로 산화했다.

형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혁혁한 무공을 세우던 동생 강영안 이등상사 역시 52년 10월 강원도 김화 저격능선 전투에서 전사했다. 형이 사망한지 1년 2개월 만이다. 그러나 유해가 수습돼 현충원에 안장된 동생과 달리 형의 유해는 64년 동안 인적이 없는 산야에 있었다. 그동안 그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해 현충원에 위패만 모셔져 있었다. 육군은 지난해 7월 19일 강원도 인제 1052고지에서 그의 군번과 이름이 새겨진 인식표와 함께 유해를 발굴했다. 육군 관계자는 “인식표에 새겨진 이름을 단서로 병적 기록을 추적한 결과 3명의 동명이인을 찾았다”며 “군번과 소속, 전사지역 등을 대조하고 유가족을 찾아 유전자 검사를 실시해 8사단 10연대 소속의 강영만 하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강영만 하사의 신원이 확인됨에 따라 군은 그의 유골을 현충원에 안장키로 결정했다. 비록 유골이지만 형제는 60여년 만에 재회한 셈이다. 군 관계자는 “이들의 형제애와 고귀한 희생정신의 의미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살아 생전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사무치게 그리워했을 형제를 한 자리에 모시고자 나란히 안장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한편, 국방부 산하 국립서울현충원은 호국형제인 강영만ㆍ영안 형제 외에도 원내에 안장돼 있는 다양한 사연들을 발굴해 소개했다. 84년 팀스피리트 훈련중 순직한 아버지(고 박명렬 소령)의 뒤를 이어 조종사가 됐지만 지난 2007년 야간 요격임무 수행중 순직한 아들 박인철 대위의 묘를 현충원은 ‘호국 부자(父子)의 묘’로 명명했다. 또 조선말 일제에 항거했던 이남규 선생은 본인은 물론이고 2대인 이충구, 3대 이승복 선생에 이어 4대인 이장원 해병 소위가 현충원에 묻혀 4대가 현충원에 안장된 유일한 가문이다. 6ㆍ25전쟁 초기 동락초등학교에 집결한 북한군 15사단 48연대 위치 정보를 국군에게 제공함으로써 대승을 거두도록 공을 쌓아 민간인 최초의 무공훈장을 받은 김재옥 여사는 남편인 이득주 중령과 함께 안장돼 있다.

이날 안장식 행사를 주관한 김요환 육군참모총장은 “살아서 만나지 못한게 안타깝지만 늦게나마 형제가 함께 하게돼 다행”이라며 “수많은 호국용사들의 유해를 하루속히 찾아 현충원에 모실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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