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을 일컫는 TK는 지역을 넘어서 특정 정치세력을 지칭한다. TK세력은 1963년 민정이양과 함께 탄생해 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30년간 한국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백남억·박준규·김성곤 등 경북 출신 구정치인들은 JP가 주도해 만든 민주공화당에 속속 합류했다.
이들을 끌어들인 건 엄민영이었다. 서울대 법대 교수를 지낸 엄민영은 5·16 거사 직후에 구정치인 중 처음으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고문으로 발탁됐다. 5·16 주체세력 상당수가 이북 출신이고 JP도 충청 출신인 상황에서 경북 출신 엄민영이 돋보였다.
김성곤(일본인 교장 퇴진 운동으로 퇴학 뒤 보성고보 졸업)과 백남억은 엄민영과 대구고보(현 경북고) 15회 동기였고, 박준규는 25회다. 이들이 공화당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고, 같은 대구고보 출신으로 정치 경험 없는 이효상이 국회의장직에 오르면서 TK세력의 기반을 다졌다. ‘경북 정치 인맥의 창시자’ 엄민영은 내무장관에 두 차례(63·66년) 발탁된다.
핵심인 엄민영(69년 사망)과 김성곤(71년 10·2 항명파동)이 사라진 뒤 TK 인맥의 중심엔 신현확이 있었다. 4·19혁명 이후 공직(전 부흥부 장관)을 떠나 김성곤이 창업한 쌍용양회 등 기업에 머물렀던 그는 73년 공화당 공천으로 국회에 입성한다. 박정희 대통령 눈에 띄어 75년 보사부 장관, 78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연이어 기용됐다. 10·26 이후 혼란스럽던 79년 말 정국을 주도한 건 신현확과 박준규 등 TK였다. 이들은 공화당 총재로 올라선 JP를 견제했다. 그 다툼 속에서 최규하(강원도 원주)가 대통령이 됐다.
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다. 전두환·노태우(육사 11기)를 중심으로 한 군부 하나회 인맥이 정권의 핵으로 떠올랐다. 전두환은 경남 합천과 대구공고 출신이지만 대부분이 경북고 출신인 하나회가 권력의 중심에 들어온다.
TK세력의 최전성기는 노태우 정부 때다.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 쪽 군 인사를 배제하고 자신의 출신 학교인 경북고 TK세력을 중용했다. 김윤환·정호용·김복동과 박철언이 제각기 파벌을 형성해 중간보스 역할을 했다. 5공 시절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였던 TK 원로 박준규는 87년 정계에 복귀해 민정당 대표까지 맡았다.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중 15명이 경북고 출신이었다. 이들을 일컬어 ‘TK 마피아’란 표현이 등장했다.
TK는 노태우 정부 후반기, 김영삼(YS)을 민자당의 차기 대권주자로 옹립하는 과정에서 분열된다. 구TK의 중심인 ‘킹메이커’ 김윤환은 YS를 밀어주며 YS 대세론을 굳혔다.
반면 신TK인 ‘6공 황태자’ 박철언은 YS와 치열하게 맞서 충돌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TK의 독주 시대가 저물게 된다. 이렇게 구축된 기반의 두터움 때문인지 TK세력은 지금도 대통령의 인사 때마다 논쟁이 되곤 한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