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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껏 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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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환영
김환영 기자 중앙일보 실장
김환영
논설위원

소신(所信)이란 “굳게 믿고 있는 바. 또는 생각하는 바”(표준국어사전)다. 그래서 아름답다. 아름답기에 강하다. ‘우리말은 중국말과 다르니 우리 고유의 독자적인 문자가 필요하다’는 세종대왕의 소신이 없었더라면 한글은 탄생할 수 없었다.

바늘구멍을 통해 나오는 빛줄기 같은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울함 속에서도 소신만큼은 결코 마르지 않았기에 선열들은 광복·산업화·민주화를 성취했다. 통일을 향한 소신만 잃지 않는다면 통일도 반드시 달성되리라. 알거지 무지렁이에 가까운 예수의 제자 12명이 당시 알려진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신 덕분이었다.

 소신이 강한 이유는 총칭(總稱)이기 때문이다. 총칭은 일치의 도구다. 총칭은 ‘전부를 한데 모아 두루 일컫는 이름’이다. 호서 사람, 호남 사람, 영남 사람, 강북 사람, 강남 사람 사이의 갈등도 ‘한국 사람’이라는 총칭 앞에서 숙연해진다. ‘사람’을 넘어 ‘생명’이라는 총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소신이라는 총칭에도 모두 한데 모이게 하는 힘이 있다. 무슬림이건, 불교도이건, 그리스도교인이건, ‘노빠’건, ‘박정희주의자’이건 공통점은 소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굳게 믿는 바’가 있다. 소신이라는 총칭을 통해 종교와 세속의 이념은 공동의 목표를 발견할 수도 있다.

 소신 있는 사람들끼리 뭉쳐야 할 당위성이 있다. 그들은 모두 현실을 넘어 ‘지금 당장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가능한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소신의 종류가 달라도 비전이 같다면 반목 대신 일치해야 한다. 뜨겁게 뭔가를 믿는 사람들이 일체감을 공유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소신의 필요성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회의적인 사람들의 수가 확대일로라는 데 있다.

 소신 없이 되는 일이 있을까. ‘돈이 최고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소신이건, ‘세계적인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야겠다’는 소신이건, 소신 없이 창업에 성공할 수 있을까. 소신은 있는 게 없는 것보다 좋다. 소신의 부재에서 많은 인간 조건의 불행이 싹튼다. 소신이 없는 데서 갈팡질팡 살게 된다.

 소신껏 살자. 또 남들도 소신껏 살게 하자. 조직원에게 각자 나름의 소신을 허용하지 않는 지도자는,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된다. 소신 없는 책임이나 창의는 없다. ‘책임 총리’는 곧 ‘소신 총리’다. 소신껏 연구를 감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그저 그런 연구 결과가 양산될 뿐이다.

 하지만 저마다 소신껏 살면 나라나 세상이 망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개개인이 이기적으로 살아도, 또 그렇게 살아야 오히려 사회 전체의 경제적 편익이 극대화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애덤 스미스는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그의 주장은 맞았다.

소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신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나와 소신이 다른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죽였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의 온갖 이단자들을 끌어 모았고 그 결과 역동적인 혁신이 이끄는 번영을 달성했다. 오늘날 소신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서 빠질 수 없는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소신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둘러싼 문제도 있다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 소신과 소신은 충돌하기도 한다. 특히 소신의 한 형태인 종교와 세속 이념 사이에는 구조적인 긴장감이 있다. 외세를 끌어들여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한 1801년 황사영 백서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은 어떤가. 예컨대 크리스천으로서의 소신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소신은 충돌할까. 충돌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무너 내리지 않을 하늘을 두고 걱정하는 것과 같다.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을 상황에 대한 너무 가혹한 설정인지 모른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예수와 대한민국 중에서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예수를 선택해야 한다. 토머스 모어(1478~1535)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소신과 국가에 대한 소신이 충돌했을 때 교회를 선택했다.

 어쨌든··· 어차피 짧은 인생, 소신 있게 살자. 피안이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을 산다고 해도 인간으로서 사는 것은 길어야 100년이다.

김환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