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정부출연연 연구개발 성과 기업 성장, 일자리 창출 동력 돼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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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호 06면

13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2015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정부 R&D 혁신방안’이 발표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사회(류장훈 중앙일보 미디어플러스 기자)] 우리나라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투자에 비해 연구의 질적 성장, 사업화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R&D 시스템의 문제점을 짚어본다면.

‘정부 R&D 생태계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주제 좌담회

[최종배 미래창조과학부 창조경제조정관] 우리나라 R&D 투자는 지난 10년간 연평균 약 12% 증가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4.15%로 세계 1위 수준이다. 우리나라에서 R&D 예산이 없어서 연구를 못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투자가 늘어나면서 갖가지 잡음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출연연구기관과 대학이 연구비를 독식하면서 ‘나 홀로 연구’를 하는가 하면, 어려운 연구보다 쉽고 빠른 연구를 선호한다. ‘성과는 있으나 쓸모가 없는’ 연구가 느는 것이다. 정부가 R&D 혁신 방안을 구상하게 된 배경이다.

산업과 괴리된 정부 R&D 많아
[박희재 산업통상자원부 R&D] 전략기획단장 그동안 정부 R&D는 산업과 괴리된 측면이 많았다. 레이저 관련 연구를 예로 들면 산업계는 레이저 소스(용접·절단 등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레이저를 만들 수 있는 장비)와 관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레이저 소스 국산화를 위해 정부 쪽에 연구 제안도 많이 했다. 실제 4~5개 연구 과제가 선정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외국에서 레이저 소스를 사서 조립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기업이 필요한 연구보다 연구를 위한 연구, 보고서로 끝나는 연구만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R&D의 효율성이 낮은 이유도 이런 문제 때문이다. 시장과 연구를 연계해야 투자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지금까지 기업은 정부 R&D의 주체라기보다 들러리였다. 연구 주제에 흥미도 없고 사업의 주체도 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기업은 정부 R&D에 참여하기보다 독자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산학연으로 성공한 대만의 이트리, 독일 프라운호퍼의 사례를 보자. 이는 나라마다 다른 문화나 철학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정부 R&D 정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부 R&D 혁신 방안은 산업 입장에서 ‘R&D 100년 대계’의 이정표를 세운 의미 있는 일이다.

국내 산업 퍼스트무버로 전환
[이우일 서울대 연구부총장] 몇 년 전부터 국내 산업이 양에서 질로, 패스트팔로어(추격형)에서 퍼스트무버(선도형)로 빠르게 전환됐다. 사실 이번 정부 R&D 혁신 방안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R&D가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효율성의 잣대를 어디에 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다. 정량평가 체계 아래에서 논문 수가 크게 늘었고, 이를 통해 국격이 높아졌다. 대국민 홍보수단으로 국민에게 알려져 행복감을 줬다면 그것으로 R&D는 성공했다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예산이 늘면서 R&D를 향한 사회적 요구가 점차 커졌다. 부작용도 나타났다. 논문 수가 100개인 사람과 10개인 사람이 같은 연구과제를 신청하면 심사위원 평가가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사실 기계 분야에선 제대로 된 논문은 1년에 10편 넘게 쓸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은 한 해 50편의 논문을 쓰는 사람도 있다.

[오태광 한국생명공학연구원장] 출연연은 대학과 기업의 다리다. 산업화, 기초연구 두 분야를 잘 연계했어야 하지만 현장에선 혼란이 적지 않았다. 고질적인 문제가 PBS다. ‘경합에 의한 발전’이란 애초의 의미는 사라지고 연구원이 마치 소상공인처럼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다. 경쟁 상대인 산업계나 대학과 협력도 잘 되지 않고 기초원천·대형공공연구 등 출연연이 맡아야 할 연구보다 성과를 내기 쉬운 연구를 좇는 문제도 생겼다. 혁신 방안을 통해 PBS가 개선된 것은 다행이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최근 스타트업에 기술을 이전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2013년 180건의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기업 중 40% 이상이 중소기업이었다.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태동기 산업을 점령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출연연은 이런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했다. 창조경제를 위해 융합과 협력을 통해 기술 산업화를 이루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사회] 정부가 발표한 R&D 혁신 방안은 어떻게 평가하나.

[박희재] 우리나라에 기업이 약 500만 개가 있다. 제조업이 30만~40만 개에 달하는데, 이 중에서 1억 달러 이상 해외에 수출하는 회사는 100개가 안 된다. 또 이 중 100억 달러를 넘는 곳은 단 두 곳이다. 단 1달러도 수출해 본 적이 없는 곳이 83%에 달한다. 중소기업은 글로벌 경쟁력을 얘기할 정도의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 기업의 활로는 해외에 있다. 그런 기업을 만들어내고 해외에 적극 소개해야 한다. 언어·문화에 대한 이해 등 이른바 ‘글로벌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대학이나 출연연이 기업 지원을 늘리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그동안 쌓아올린 인프라와 시설을 중소기업의 역량 강화에 투입한다면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 R&D 혁신 방안은 그런 부분을 잘 담고 있다. 안정적으로 정책을 추진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중소·중견기업 R&D 인력 지원을
[이우일] 중소·중견기업 지원을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 R&D 인력이다. 이런 면에서 대학의 역할과 비중이 크다. 연구비 규모가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반대로 비용을 따져가며 과제에 참여하는 일은 줄 것이다. 그동안 대학과 출연연은 대형 과제보다 상대적으로 연구비가 적은 중소기업의 연구 과제엔 협력을 소홀히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공대는 기술 개발과 산업화에 존립 이유가 있다. 이 때문에 R&D 혁신 방안을 더욱 환영한다.
 그러나 몇 가지 우려할 만한 점도 있다. 예를 들어 삼성이 갤럭시를 만들 때 대학과 출연연은 이를 뒷받침할 수가 없다. 이르면 6개월 내에 신제품이 출시되는데, 지금 구조로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기업이나 기술 중심 중소기업은 투자비와 인력 부담을 줄이기 위해 출연연이나 대학을 찾는다. 이런 점을 고려해 역할을 분담하는 게 바람직하다. 신설하는 과학기술전략본부(가칭)는 과연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전략본부장의 직급은 어느 정도가 될지도 확실치 않다. 부처 간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일도 어려울 것이다. 단계적이 아니라 실무 차원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빠르게 진행하는 추진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제조업에서 전자는 17~18%, 바이오 분야는 2% 정도다. 그런데 대학에서 이뤄지는 R&D는 바이오 30%, 전자 8% 수준이다. 이런 미스매칭을 수요와 공급의 부조화로만 봐서는 안 된다. 대학은 10~20년 후를 내다보는 곳이다. 만일 100% 산업계를 위해 인위적으로 수요와 공급을 조절한다면 국가의 미래가 흔들릴 수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정부가 칼을 들이대서는 안 된다.

[최종배] 정부의 R&D 혁신 방안은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된다. 전략적인 투자, 수요자 중심의 연구시스템, 연구의 질적 평가다. 우선 연구기관별로 역할을 명확히 나눈다. 민간과 정부의 역할을 구분하고 산학연 간의 역할을 분명히 할 계획이다. 이제까지 연구 과제는 대학과 출연연이 주도해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기업이 참여한 형태였다. 이제부터 산업 주도 과제는 산업체를 먼저 참여시키고 산업체가 연구기관의 협력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바뀐다. 이외에도 평가 방식은 공대 혁신 방안에서 다루고 현행 틀을 기준으로 보다 강력한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체제를 정비할 계획이다.
 정부 R&D 혁신 방안을 투자 효율화 측면에서 해석해 주길 바란다. 예산을 줄이거나 기관의 기능을 규제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도 사실 잘 해왔다. 정부는 국민에게 다가가는, 국민이 원하는, 미래를 준비하는 R&D 정책을 구체적으로 세우는 일이다. R&D 정책의 컨트롤타워인 과학기술전략본부(가칭)는 부처마다 분산된 관리 기능과 싱크탱크를 하나로 합한 개념이다. 역할 중복을 피하면서 협력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과도한 경쟁에 의한 연구기관의 체력 소모도 줄 것이다.

[사회] R&D 혁신 방안이 현장에 정착하기 위해 어떤 점이 요구되는가.

[이우일] 정부 지원 방향이 중소기업에 쏠리면 대기업이라는 중요한 성장동력을 잃을 수 있다. 기술을 응용하는 데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구분해선 안 된다. 적절히 균형을 갖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연구 평가 방식에는 공정성과 전문성이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공정성에 너무 치우쳐 있었다. 평가위원 중에 전문성이 전혀 없는 사람도 많다. R&D의 질적 성장을 위해 전문성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R&D의 주체가 정부에서 수요자로 이동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수요 측면이 공공·안전 등 기술 분야인지 산업 분야인지, 만일 이 두 영역이 모두 포함되면 포트폴리오는 어떻게 구성해야 할 것인지를 다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대학·출연연 기업에 문턱 낮춰야
[박희재] 대학과 출연연이 기업을 향한 문턱을 낮춰주면 좋겠다. 기업을 대하는 문화가 너무 경직돼 있다. 까다로운 규정과 소위 말하는 갑을 문화 때문에 어려워하는 기업이 많다. 여러 기관이 기업에 대한 평가에 날을 세우기보다 어떻게 하면 기술사업화를 이뤄 기업에 날개를 달아줄지를 함께 고민하길 바란다.

[오태광] 산학연이 융합하고 협력하는 연구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밀어주고 끌어주며 신뢰감을 쌓아야만 궁극적으로 경제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민간 분야의 적극적인 투자도 요구된다. 바이오 벤처기업 M&A에 미국 기업의 89.9%가 투자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1%에 불과하다. 단기 수익을 내기보다 기업을 키우는 쪽으로 투자를 이어가야 한다.

[최종배] R&D 혁신 방안은 특정 연구원이나 연구기관을 겨냥한 정책이 아니다. 세 차례에 걸친 토론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했고 출연연을 돌면서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정부 내에서도 부처 관계자들이 긴밀히 교류하면서 문제를 풀어가고 있다. 가능하면 올해 안으로 관련 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다. 과거에는 정부 정책이 발표된 뒤 흐지부지됐지만 이번 정책만큼은 법 개정이 필요한 부분 외에는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겠다.

사회=류장훈 기자 ryu.janghoon@joongang.co.kr, 정리=박정렬 기자 park.jungryul@joongang.co.kr, 사진=서보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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