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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숙대교수·국사학>|부끄러움 모르면 병든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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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예레미야」는 자기민족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적 상황을 두고 신의 뜻을 이렇게 대변하였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섬을 용서하리라.』자기 조국을 의해 항상 눈물을 흘렸다는 이 눈물의 예언자는 자기나라의 위기의 원인이 (호시탐탐 침략을 노리는 바빌로니아의 호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수도 예루살렘의 그 넓은거리에서도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찾는 자를 한사람도 발견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에 있다고 진단했다.
그의 예언은 계속된다. 『남을 속여 약탈해온 재산을 제집에 채워 벼락부자가 되고 세력을 휘두른다. 피둥피둥 개기름이 도는 것들, 못하는 짓이 없구나. 남의 권리 같은 것은 아랑곳 없다는듯 고아의 인권을 짓밟고 빈민들의 송사를 공정하게 재판해주지도 않는다. 이따위 족속에게 어찌 내가 분풀이를 하지 않겠느냐?』그의 비관적인 이러한 예언은 물론 환영받을 수 없었다.
지배자들은 그를 국론불열을 꾀하는 자로 몰아 여러 차례 투옥시켰고「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직업적인 거짓예언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그에게 죽음의 저주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한사람의 의인을 얻을수 없었던 저 나라는 그의 예언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 멸망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비슷한 사실이 소돔이라는 도시의 멸망을 전하는 대목에서도 보인다. 동성연애등 향락문화가 그처럼 발달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그 도시는 의로운 사람 10명이 없어 신의 심판을 받아 불바다로 화했다는 것이다.
앞의 두 사례는 정의와 사회흥망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엄숙히 경고하는바가 있다. 추상적인듯한 정의관념이 동양에서는 자못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열전 첫머리인 백이열전에서 백이·숙제를 의인이라 하였다. 두 형제는 은나라를 치려던 무왕에게 효와 인으로「충간」했고 천하가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자 이를「부끄러이」여기며「신의」를 지켜 수양산에 들어가「굶어 죽었다」. 그들이 의인으로 지목된 것은 충간·부끄러움·신의·굶어죽었다는 단어들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사마천은 의인을 다루고 있는 이 열전에서 엉뚱하게도 도척(도척)을 거론, 대비시켜 우리를 긴장케한다. 그는 도척을 두고「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회쳐먹고 포악방종하여 수천명의 무리를 모아 천하게 횡행하였으나 끝내 천수를 누렸다」고 하고, 그 밖에도 남에게 못할짓을 마음대로 하고도 종신토록 호강하며 자손들도 부귀를누린자들이적지않다고썼다.
그러면서 그는 걸음 한번, 말 한마디를 조심하면서 공정하게 행한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말하고 하늘을 의심하기 조차 했다. 이러한 의문은 우리에게도 부닥치는 의문이오, 도전으로서 해방독립과 민주·인권을 위해 몸바친 정의의 사람들 대신 친일·변절·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한 해방이후의 우리의 상대사를 돌아보면서 절실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비관적인 의문도 역사를 통해서는 용기로 바뀐다. 역사는 의인들의 삶과 희생을 밑바탕으로 하여 사실은 유지되었고, 도척같은 무리들의 횡행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념 때문에 죽어간 연약한듯한 의인들을 역사는 그 주역으로 들어올리기에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앞에서 본 바와같이 사회와 국가의 흥망에는 의인의 존재유무가 그만큼 중요해던 것이다.
태평성대론에 대풍과 올림픽의 화려한 꿈, 해마다 교육인구와 종교인구가 증가하고 과학문명의 발달에 경제생활이 윤택해진다는 낙관적인 통계수치가 제시되는데, 하필 비관적인 의인론을 제기하느냐고 반문할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 만연되어 가는 우려할만한 풍조는 낙관적인 통계수치와는 반대로 개인의 심성과 사회관계를 황폐시켜 가고 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과 사회악을 증오하는 의문(정의감)이 상실되어가는 점이 그것이다. 수치심과 정의관념을 잃어간다는 것은 한마디로 양심의 마비현상을 의미한다. 부끄러운 일을 하고서도 수치심을 갖지않는 병적현상이 우리사회에 가속도적으로 노골화되어「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는」풍조가 조성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법의 심판을 받는 자들조차도 자신의 허물을 후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 보다 더 무거운 죄를 지은사람들이 법망에 걸리지않고 밖에서 떵떵거리며 행세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부끄러움이 없어지는 사회에는 병적인 모습이 속출된다.
윤리·도덕·법등 종래듸 부끄러움을 알게하던 규범들이 무시되고 힘에 의한 규제만이 부끄러움을 갖게하는유일한 수단으로등장하는악순환이계속된다.
헌법보다는 법이, 법보다는 행정명령이, 명령보다는 전화 한 통화가 규제력을 더 갖는다면 이 때문일까.
법에 걸리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이 있다면 그것은 법의 권위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강제때문이며 수치심 때문에는 더욱 아니다. 수치심이 없어지면 자기를 모멸하는 눈도 의식하지 못한다. 또 개인은 물론 공직자도 책임을지지 않으며 공적지관이 공신력을 상실하는 작태가 일상화하게 된다. 책임정치를 구현하겠다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거론하는것조차깔아뭉개버리는 안하무인격인 우리네 상황은바로이때문이 아닐까.
맹자는 수오지심이 의의 발단이오, 그것이 바로 의라고 규정하였다.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할줄 알고 타인의 잘못을 미워하는 것이 곧 정의의 발단이오, 정의 그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국민속에 급속히 뿌리내려가고 있는 이 뻔뻔스러움을 각성시키고 식언하면 약간은 부끄러워할 줄도 알고 부정직과 무책임에 대해서는 공분을 발할줄도 아는, 그리하여 수치심과 증오심(정의관념)을 거족적으로 깨우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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