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현장 사설

“정파보다 국가 우선해야 개혁 성공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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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치지도자라면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는 리스크를 감당해야 한다.” 제주포럼 참석차 방한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유독 강조한 대목이다. 그는 총리 시절 노동시장·연금 개혁인 ‘어젠다2010’을 추진하다 총선에서 패배했는데 후회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정치가 중요하지만 국가만큼 중요하지는 않다”고 강조했다. 어제부터 중앙일보와 제주특별자치도·국제평화재단·동아시아재단이 공동 주최하는 제주포럼에서 슈뢰더 전 총리는 특별히 주목을 받은 인사다.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구조개혁을 밀어붙여 통일 후 침체에 빠진 독일 경제를 부활시킨 주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포럼의 기조연설, 중앙일보 인터뷰, 권영세 전 주중대사 대담 등 숨 가쁘게 이어진 일정 내내 일관되게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노사정 대타협이 무산되고 공무원연금 개혁도 지지부진한 우리에게 슈뢰더의 충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개혁 추진 과정에서 배울 첫째 교훈은, 정치적 득실을 따져 개혁을 추진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슈뢰더가 개혁을 추진할 당시인 2003년 독일은 통일 후유증으로 ‘유럽의 병자’로 불렸다. 마이너스 성장과 재정적자에 허덕였고 실업자가 450만 명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그는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만들고 복지 지출을 줄이고 연금 지급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높이는 개혁을 밀어붙였다. 대신 청년 일자리 지원을 확대하고, 소득세를 낮추는 등 경제 활성화 정책을 썼다. 이는 슈뢰더에겐 정치적 패배를 각오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그는 “선거에서 낙선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밀어붙였다”며 “구조개혁은 초기에 고통을 수반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성공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슈뢰더 총리의 지지 기반인 노조가 반발했다. 그 뒤 총선에서 져 총리직에서 물러나지만 개혁의 효과는 후임 메르켈 총리 때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일은 유럽 재정위기를 굳건히 견뎌냈다. 정치적 이익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 슈뢰더의 결단이 독일 경제를 살린 셈이다. 슈뢰더의 ‘살신성인 개혁’은 공무원들 눈치를 보느라 반쪽짜리 개혁안도 쉽게 합의하지 못하는 우리 정치권이 자성해야 할 부분이다.

 그 다음으로, 노동계·재계 등 이해집단의 의견을 수렴하되 합의가 안 되면 정부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는 노동계의 반대를, 최저임금 도입은 재계의 반발을 샀다. 슈뢰더 정부도 개혁 초기엔 우리의 노사정위원회 같은 합의기구를 가동했지만 노사가 정부에 요구만 할 뿐 서로 양보를 하지 않았다. 결국 슈뢰더는 정부 주도로 개혁을 마무리했다. 이는 노사정 대타협이 무산된 한국이 유심히 봐야 할 대목이다. 합의 과정에서 양측의 주장을 충분히 들은 만큼 정부 주도의 ‘B플랜’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구조개혁을 빨리 할수록 효과가 크다는 점이다. 공산권의 붕괴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지만 독일은 혹독한 통일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슈뢰더는 “통일 후 10년이 지나서야 어젠다2010이 관철됐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너무 늦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이 북한과의 통일에 대비하려면 지금부터 구조를 개혁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조언했다.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는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있다. 슈뢰더가 추진했던 최저임금제는 경쟁 당인 메르켈 총리 때 성사됐다. 허구한 날 여야가 싸우다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우리 정치권의 모습과 대비된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이날 슈뢰더 전 총리와 만나며 “독일 경제의 성공 이유를 통합의 정치에서 찾고 싶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 사회가 개혁에 성공하려면 정파를 초월한 정치권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실 지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노동시장 개혁, 공무원연금 개혁은 문 대표의 정치적 동지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것과 비슷한 방향이다. 여당에서 야당이 됐다고 반대만 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정파의 이익보다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 슈뢰더 전 총리가 제주포럼을 통해 본인의 생생한 육성으로 전해준 독일의 구조개혁에서 한국이 가장 배워야 할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