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6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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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신문사 일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아침 열시쯤 나가 열한시에 공장에 내려가 판을 짜고 대장을 편집국장한테 보여 OK를 받으면 그날 신문 일은 끝난다. 그런데 공장사람이 말을 잘 안들어 괴로움을 당할 때가 많았다. 그 사람들은 내가 처음 들어와 부장이나 하는 판짜는 일을 하고 있고 경성제국대학을 나왔다고 건방지게 군다고 해 나를 곯려주려고 마음 먹은 것 같았다. 내가 하라는 대로 기사를 짜놓지 않고 일부러 판을 몇 번씩 뜯어 고쳐 시간을 끌게 하는 등 나를 애먹였다.
이런 일은 그들이 애송이 편집자를 곯리느라 으례 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자기들끼리 나를 곯려주려고 그랬다고 떠드는 소리를 들였다. 이런 사람들을 잘 다루면 장관이 될 수 있다고 어떤 유명한 신문기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점심을 먹고 내일 쓸 원고를 만들어 공장으로 내보내면 일은 끝나는데, 가정면은 의사한테 젖먹이 기르는데의 주의사항, 백일해 예방법 등을 부탁하면 자기들의 광고라 잘 써주었다. 이것을 손질해 공장에 내보내고, 학예면은 원고료를 타려고 가져온 원고가 많이 쌓였으므로 이중에서 원고를 골라내면 된다. 그때 원고료가 2백자 원고지 한 장에 30전이었으므로 열장이면 3원, 스무장이면 6원인데, 이것을 바라고 원고를 내달라고 조르는 사람이 많았다. 제일 많이 조르는 사람이 노장에서는 양백화, 젊은 패에서는 이상이었다. 장편소세은 1회에 2원씩 주는데, 1백회면 2백원, 2백회면 4백원이된다. 이것이 걸리면 원고료로 얼마동안 살수 있고 끝난 뒤 책을 내면 인세가 들어오므로 수입이 괜찮다. 동인·상섭·방인근·채만식등이 경쟁자였다. 장편소세만은 원고를 한꺼번에 다 써오면 부사외의 도장을 방아 원고료률 미리 다 줄 수 있게 되었다. 부지런하고 속필인 김동인은 1백50회를 한꺼번에 써와 3백원을 받아 간 일이 있었다.
원고료이야기가 나왔으니 아주 이야기해버리겠는데, 이상협이 나중에 부사장으로 취임해 조석간으로 지면을 늘리고 조간 1면에다가 「일 일 일 문」이란 난을 만들어 하루에 한사람씩 수필을 쓰게 했는데, 이 원고료가 2백자원고지 7∼8강에 5원이었다. 보통원고료의 2배였으므로 이것을 노려 많은 사람들이 쓰려들었다. 지금 누구라고 밝힐 수 없지만, 유명한 독립의사의 아들이 이상협한테「일 일 일 문」을 한달에 네번만 쓰면 2O원이 들어오니까 그것을 가지면 호구할 수 있으니 본명은 내놓을 수 없고 가명이나 아호로 쓰게 해달라고 졸라댄 일이 있었다. 이것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사람의 예지만「일 일 일 문」에 많이 투고한 사람에 김소운이 있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나「일 일 일 문」2회분을 내놓으면서 느릿느릿한 목소리로『이거 어떻게 할 수 없을까』한다. 나는 아무 말 안하고『어디 해봅시다』 하고 경리부장보다 위인지배인한테 가서 이야기를 해 돈을 마련해 내밀면『허허허, 살았다!』하고 총총걸음으로 가버렸다. 경리부장은 깐족이고 돈을 잘 안주니까 나는 급하면 지배인한데 가 도장을 받는데, 이것은 물론 건방진 짓이다. 해방 후 몇번이나 소운은 나를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하고 『그때 당신은 구세주입디다,』하고 껄껄 웃었다.
이렇게 경리부장한테 미움을 사가면서 그 상관인 지배인의 도장을 받아 급한 사람의 원고료를 얻어주는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어느 때 이런 실패도 있었다.<조용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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