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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의 반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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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페니실린이 대중에게 첫선을 보인 것은 1942년 11월의 일이다. 미국 보스턴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큰불이 나 수백 명이 화농성 병원균에 감염돼 죽어나갔다. 그러나 회생 가망이 없던 환자들은 영국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푸른곰팡이에서 배양한 페니실린 덕으로 거짓말처럼 완치됐다. 페니실린을 '기적의 영약(靈藥)'이라며 환호했다.

그로부터 2년 뒤 미국 미생물학자 셀먼 왁스먼은 결핵균을 퇴치하는 스트렙토마이신을 개발했다. 이 마이신은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결핵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켰다. 50년대 초반 미국 양계농장에선 놀라운 발견이 이뤄졌다. 갓 태어난 병아리에 마이신 계열의 항생제가 섞인 사료를 먹였더니 성장속도가 크게 빨라졌다. 당시 영국 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동물 성장을 50% 촉진하는 약물 발견"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후 항생제를 먹인 가축에서 나오는 고기.우유.달걀이 면역력을 증가시키는 좋은 식품으로 떠올랐다.

이때만 해도 항생제의 완승 분위기였다. 인류가 박테리아(세균)를 정복한 듯했다. 오산이었다. 세균이 반격에 나섰다. 세균은 항생제에 노출되면서 이에 저항하는 돌연변이를 일으켜 생존력을 키운 뒤 인간에게 대항했다. 페니실린과 마이신에 끄떡하지 않는 세균들이 속속 등장했다.

항생제의 치료 원리는 세균이라는 미생물로 미생물을 죽이는 것이다. 인간은 더 강력한 항생제를 찾아냈다. 세균들도 새 항생제와 싸워 이기는 자생력을 키웠다. 최근엔 어떤 항생제도 물리칠 수 있는 수퍼 박테리아까지 등장했다. 인간과 미생물의 끝없는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서울행정법원이 보건복지부에 감기 환자에게 항생제를 많이 처방하는 의료기관의 명단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감기는 바이러스성 질병으로 세균 증식을 막는 항생제로는 효과도 없다. 항생제를 남용해 면역력만 떨어뜨리는 셈이다. 한국은 강력한 내성(耐性)을 가진 세균의 공격으로부터 가장 취약한 국가 중 하나라고 한다.

병원에서 불필요한 항생제를 받아 먹고, 항생제를 섞은 사료로 키운 가축과 양식 어류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일 항생제를 먹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21세기 인류의 최대 위협은 암이나 에이즈가 아니라 폐렴이나 임질 등을 일으키는 흔한 세균들이다. 이제 세균들의 총공세가 시작됐고, 인류는 실탄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생물학자 스튜어트 레비의 경고가 섬뜩하다.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