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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8)-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51)/조용만|보전인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보전의 재단 이사회에서는 재단과 학교를 무조건으로 인촌에게 넘기면서 다만 다음 세가지를 「희망사항」으로 전달하였다.
일, 현재의 학교 직원의 지위를 보장해줄것.
이, 학교의 명칭을 변경하지 않을것.
삼, 교사의 신축을 급속히 실행할것.
인촌은 이 세가지 희망을 다 받아들였지만 한가지 학교이름에 대해서는 『전문학교로 있을 동안에는 학교이름을 고치지 않겠다』고 대답해 대학으로 승격할때도 그냥 그대로 둘는지의 여부는 그때가서 보아야겠다는 뜻을 분명히하였다. 이점에 대해서도 이사회는 양해하였다.
교사를 신축해달라는 「희망사항」은 그때의 교사꼴을 보면 납득할만하였다. 그때 진성전문학교는 송현동에 있었다. 나는 제1고보에 다닐때 아침저녁으로 이 학교 앞을 왕래하였으므로 잘 알고 있는데, 화동에 있는 제1고보에서 안국동으로 내려오는 길 옆에 왼쪽으로 근화여학교가 있었다. 지금의 덕성여고자리인데, 그길 건너편에 있는 작은 학교가 보성전문학교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한길 옆으로 붉은 2층 벽돌집이 한채 있었고, 그 옆으로 목조 2층건물이 있을뿐 학교건물이라고는 이 두채밖에 없었다. 운동장이란 명색이 목조건물앞에 테니스코트가 하나 있을뿐이었는데 빈약하기 짝이 없는 학교였다.
과는 법과·상과 둘뿐이고 교원은 법과에 옥선진·최태영·도변의 세사람과 상과에 김영주·홍성하·백상규·고교의 네사람, 합해서 일곱사람이었다. 이 일곱선생이 한방에서 복작거리고 사무실도 작은방 하나뿐이었다.
교장실은 목조건물 속에 있었는데 박승빈교장이 혼자 쓰고 있었다. 박승빈은 지금 젊은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지만 유명한 한글학자였다.
그는 인사동에 계명구락부라는 사교클럽을 만들어 많은 우리나라 학자들을 모아 『계명』이라는 학술잡지를 1년에 두번, 봄·가을로 발간해 한국학의 부흥을 꾀하고, 또 한편으로는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임규·이윤재를 시켜 어휘를 수집케 하였다. 구락부는 2층에 있었는데, 거기다가 칸막이를 해놓고 『조선어사전』편찬의 일을 보게했었다.
이광재는 나중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경찰의 고문에 못이겨 옥사한 유명한 한글학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임규도 기미독립운동때 공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와 일본내각및 귀중양원에 보내는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최남선한테서 받아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해 3월1일 동경에 도착하여 그 문서를 일본내각과 귀중양원에 우송한 사람이다.
그뒤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을 살고 나왔는데, 생계가 막연하므로 최남선이 박승빈한테 부탁해 『조선어사전』편찬의 일을 보게한것이다. 그는 일본어 문법에 대해서는 일본사람보다 더 잘 알아 유명하였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이 계명구락부 아래층에서 복혜숙이 「비너스」라는 바겸 다방을 경영하였다.
박승빈은 계명구락부를 중심으로 신생활운동을 일으켜 음력설 폐지를 주장하였고 겨울에 입는 두루마기의 기다란 고름을 없애고 단추를 달것등 의식주에 걸친 생활개선을 제창하여 구악부원에게 실행시켰다.
한글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조선어학회」와 별도의 「조선어학연구회」를 조직하여 기관지 『정음』을 발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를 인촌에게 인계하고 교장직을 물러난 뒤에도 몇햇동안 노구를 무릅쓰고 보전에 나와 무보수로 조선어 문법을 강의하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신념과 기개의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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