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 무기로 옛 소련 패권 회복 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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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겉으로 보이는 가스 분쟁의 원인은 가격이다. 러시아는 그동안 소련권 국가에 파격적으로 낮은 값으로 가스를 공급했다. 우크라이나가 그동안 러시아에 지불했던 가스 가격은 1000㎥당 50달러였다. 서유럽 국가들이 내고 있는 평균 135달러에 비하면 특혜였던 셈이다. 러시아는 이를 230달러로 세 배 이상 올려 달라고 요구했다. 지난해 12월 초 유럽연합(EU)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시장경제' 지위를 인정한 것이 근거가 됐다. '이제 자유국가가 됐으니 거기에 걸맞은 돈을 내라'는 얘기였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는 "가스 가격을 더 지불하되 점진적으로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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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러시아의 진짜 의도는 천연가스를 무기로 우크라이나를 손보려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는 단순히 친서방 노선을 걷는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보복 차원이 아니다. 지정학상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흑해와 중유럽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전략적 요충지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고삐를 죔으로써 소련권 국가들과 중앙아시아에서 패권적 지위를 확고히 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최근 미국과 유럽이 소련권과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위협을 느끼는 데서 비롯됐다. 2004년 미국 주도로 이뤄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구권 확대나 폴란드.체코.헝가리 등 소련권 국가들의 EU 가입 등이 크렘린의 불안감을 부추긴 대표적 사례다. 러시아가 유럽 국가들의 피해를 예견하면서도 이번 사태를 야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길들이기'라는 악역은 국영 가스회사인 가스프롬이 맡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가스프롬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이 회사의 주식 51%를 정부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크렘린은 가스프롬뿐 아니라 다른 에너지 기업들도 국유화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가스프롬은 몰도바에 대해서도 가스값을 기존의 80달러에서 160달러로 올릴 것을 요구하는 등 러시아에 비협조적인 국가들을 압박하고 있다.

러시아가 '시장경제' 지위를 부여받은 우크라이나에 시가대로 가스값을 내라고 하는 것은 논리상으론 문제가 없다. 러시아는 서유럽 국가들에도 현재 평균 135달러인 가격을 연내 255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양국 간 가스 분쟁은 결국 가격 인상 쪽으로 결론 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EU가 우크라이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차관을 제공하는 등 중재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EU가 나설 경우 사태는 진정될지 모르나 3월 총선을 앞둔 유셴코 대통령의 입지는 한층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유셴코는 러시아가 1년 전부터 가격 인상 방침을 통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지금으로선 국내 정서상 러시아의 가격 인상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그렇다고 계속 버티기도 힘든 형편이다. 만약 이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져 총선에서 경쟁자인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에게 패한다면 이 또한 푸틴 대통령이 노리는 가스 싸움의 부수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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