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신」정립에 불교역할 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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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삶의 괴로움이 소멸되기를 갈망한다. 어느 시대나 고뇌가 삶을 절망하게 한다. 그 절망을 극복하려고 사람들은 불교를 믿는다. 분명히 불교는 현대인에게 가장. 절실한 종교의 구실을 할수있다. 불교는 고의 소멸에 이르는 깨달음을 인도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불교는 그같은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많은 신도들이 이점을 안타까와하고 있다. 그래도 불교의 품을 떠날 수 없는것은 그 가르침이 현대인의 삶을 지탱하게하는 열쇠를 주는 까닭이다.
불교의 믿음은 삼보에 압축되어 있다. 불·법·승이라는 3가지 보물은 불교가 종교로서 존재가치를 확충하려면 먼저 부처님과 불법·승단의 관계에 흐트러짐이 없어야함을 뜻한다.
고의 소멸에 이르는 깨달음이 불이며 그 깨달음의 모범된 말씀이 법이다. 그 불·법대로 수행하며 화합하는것이 승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승은 불·법을 실천에 옮기는 자이므로 사람들이 그 스님을 존경하고 때로는 외경스럽게 따르기도 한다. 스님이 속인과 다름이 없을때 삼보의 관계는 흐트러지고 그 결과 불교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지금 우리의 스님들은 이점을 명심해 주었으면한다.
불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스님들에 대해 실망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불교에서 승이 귀한것은 무엇보다도 불·법을 위해 화합하는데 있는것이다. 분명히 지금의 스님들은 그 화합을 잊은것이 아닌가싶어 안타깝다.
불·법대로 수행한다면 신흥사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수도 없었을것이며, 지난해 조계사의 담장을 헐고 총무원엘 들어가야 할리도 없었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종정의 교시를 무시하고 어떻게 화합을 얻겠는가 싶어서 한심하기도 했다. 승에는 소장세력도 원노세력도 필요없는 것이다. 불교의 믿음에서 분별이란 처음부터 부정되어있다. 세력다툼이란 분별의 탓이며 이는 불·법을 모욕하는 처사일수밖에 없다.
또한 불·법에는 개혁도, 보수도 문제가 되지않는다. 승은 불·법에 따라 수행하며 불자로 하여금 고의 소멸을 향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도록 헌신하면 된다. 오직 근본에 따라 불·법을 널리 펴야한다는 이 시대의 양심을 오늘의 승이 갖추어주었으면 하는마음 간절하다.
지금의 불교가 종권다툼으로 허송할수는 없다. 왜냐하면 오늘의 불교는 이미 토속화된 종교이므로 「한국정신」을 정립하는 바탕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사명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무대에서 나라가 대접을 받으려면 그 민족의 정신이 뚜렷해야한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든든한 한국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태국에 가면 태국정신이 있어 태국인의 세계성으로 통하고 일본에 가면 일본정신이 일본인의 세계성으로 통한다.
태국이나 일본정신의 정립에는 불교가 결정적인 바탕의 구실을 하고있다. 그 결과 불교는 태국이나 일본을 세계에서 떳떳한 대접을 받게 해준다.
그래서 불교는 그들에게 정신작용의 디딤돌이 되어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불교는 왜 그렇게 되지못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가장 궁극적인 고뇌와 절망은 문화정신의 혼돈에서 기인한다. 정신이 부초처럼 되어있으니 욕망의 작태가 빚어지는 처지에 있다.
이러한 처지를 치유할수 있는 믿음은 불·법을 통해서만 참으로 가능하다. 오늘날 우리의 스님들에게 부여된 소명은 들떠있는 우리의 정신을 불·법으로써 진정시키는데 있는것이다.스님들은 한국정신의 결여로 또 다른 「사대」의 환멸을 맛보게 될 위기에 있는 이민족을 제도하려는 큰뜻을 갖추었으면 한다.
신라정신과 원효의 관계를 돌이켜보고, 고려시대의 지식을 생각하면 스님의 존재이유와 그가치가 분명해질 것이다. 여기서 종권다툼이란 너무도 부끄러운 사태일뿐 불교현대화의 진통일수도, 불교개혁일수도 없음을 알수있다.
그 현대화란 삼보로써 이시대의 고뇌와 절망을 어떻게 극복할수 있게 하느냐에있는 것이지 승단의 권력구조에 달려있는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한국불교는 『염불은 멀리하고 잿밥에 눈독둔다』는 지탄을 불식시키면서 불가의 삼보정신으로 이 시대를 건져주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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