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 2035

딸 바보 아빠 많다지만 … 아들, 건강하게만 자라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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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류정화
JTBC 국제부 기자

대학 시절 학생회장을 맡으면서 성을 떼고 ‘정화’라는 이름을 썼다. 부모의 성을 함께 쓰는 양성 쓰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좀 거추장스러워 보여서 아예 성을 떼어버린 거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들이 ‘네가 얼마나 잘못했으면 딸이 네 성을 떼냐’고 핀잔을 줬다는 거다. 그동안 서운했던 게 있으면 털어놓으라고도 했다. 엄마는 한술 더 떠서 남동생과 나를 차별한 적이 없다면서 푸념했다. 그땐 섭섭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한참 동안 부모님을 달랬다.

 그런데 얼마 전 내 돌 사진을 보고 서운함의 실체를 깨달았다. 사진 속의 나는 한 살 배기 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남색 쾌자에 금박 무늬가 새겨진 검은 복건을 쓴 도련님 차림이었다는 거다. 엄마 말로는 당시엔 여자아이들에게도 남자 한복을 입히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유행의 배경을 캐보니 역시나 다음에 태어날 동생은 아들이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이 깔려 있었다. 오랜만에 꺼낸 사진첩 속 돌 사진을 보면서 나는 꼭 딸을 낳아서 그 모습 그대로 잘 키워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아기가 생겼다. 병원에선 자연스럽게 성별을 알려줬다. “아들이시네요.” 서운한 맘이 불쑥 들었다. 아들을 낳을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길거리를 지나다 핑크색 아기 옷만 보면 마음이 설렜던 터였다. 그런데 주변 반응은 달랐다. “한 방에 해결한 걸 축하한다” “어른들이 좋아하시겠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딸·아들의 엄마인 친구는 첫째 딸을 낳은 뒤 시댁의 등쌀에 밀려 아들을 낳기 위해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니며 별별 민간요법을 다해봤다고 털어놨다. 요즘 딸 바보 아빠들이 많아졌다지만 아들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건 아니었나 보다. 이런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 나도 슬그머니 꼭 둘째를 낳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아기를 만날 날이 한 달쯤 남았다. 서운했던 마음보단 어떤 아들로 키워야 할까 하는 고민이 앞선다. 요즘 TV를 보니 요리 잘하는 남자가 인기던데. 아니 똑똑하고 센스 있는 ‘뇌가 섹시한 남자’로 키워야지. 그러면서도 책임감과 박력을 지닌 상남자를 포기할 순 없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규범에서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했던 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건 아닌가 싶어 깜짝 놀라게 된다. 돌연 반성 모드로 돌아가 아기에게 속삭인다. “건강하게만 태어나 줘.”

류정화 JTBC 국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