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층 투표로 '좌파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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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가 좌파 돌풍에 휩싸였다. 3억6500만 명에 달하는 인구 중 3억 명이 좌파 또는 중도 좌파 정권 아래서 살고 있다. 18일 볼리비아 대선에선 좌파 후보 에보 모랄레스(46)가 당선됐다. 합법적인 좌파 혁명이다. 새해 중남미에서 대선을 치를 나라는 9개국. 전문가들은 '좌파 도미노' 현상이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볼리비아 사례를 들여다보면 중남미가 왜 왼쪽으로 기우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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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화와 함께 커지는 빈곤층의 분노="볼리비아에서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1959년 쿠바 혁명과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 혁명은 앞으로 중남미의 다른 국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국은 아주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로저 파도 마우러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는 7월 허드슨연구소에서 연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그것은 '합법적인' 혁명이었다.

볼리비아는 과거 20년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실시해 왔다. 그러나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세계화와 민주화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 바로 인종 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다. 미국 언론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26일 뉴욕 타임스(NYT) 기고문에서 "인종 차별과 불평등이 사회주의의 재도래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그는 "빈곤층인 원주민들의 분노가 자본주의와 함께 자랐다"고 표현했다.

볼리비아에서 부를 틀어쥔 부유층은 전체 인구 중 약 3%에 불과하다. 이들은 모두 백인이다. 500여 년이나 지속된 백인 지배 문화의 단면이다. 나머지 인구 중 65%에 달하는 원주민들은 극빈층이다. 미국의 경제 운용 방침을 충실히 따랐지만 부익부 빈익빈 현상만 심화됐다. 브룩스의 표현을 빌리면 '세계화가 초래한 (인종.계층 간) 불균형'이다. 그는 "시장경제 추구 등 거시경제 개혁만 있을 뿐 민심을 살 만한 미시적 개혁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런 의견에 에이미 추아 예일대 법대 교수도 동의한다. 추아 교수는 2003년 발간한 '불타고 있는 세계(World On Fire)'에서 "흔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병행하는 것이라고 보지만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몰아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개도국에선 다수 빈곤층이 합법적인 투표를 통해 세계화의 과잉 수혜자들을 몰아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등장했다"고 덧붙였다.

◆ "미국은 중남미 무시하지 말고 스스로 달라져야"=모랄레스 대통령 당선자 때문에 미국은 몹시 불편해졌다. 그는 반미.반다국적 기업 노선을 천명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볼리비아를 왼쪽으로 더 밀어내고 정치 대립을 심화시켰다"며 미국 책임론까지 거론하고 있다. 미국이 이 지역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스티븐 존슨 미 헤리티지재단 연구원은 "9.11 테러 이후 부시 정권의 외교 정책이 중동에 치우쳐 왔다"며 "남미 지역의 민주화를 위해 한 게 없었다"고 비판했다.

중남미 전문가인 구스타보 웬스조 미 세인트토머스대 국제학연구소 소장은 21일자 파이낸셜 타임스(FT) 칼럼에서 "부시 정권은 중남미 정책 담당자를 1급 외교 관리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남미를 '악의 축'이라고 부르거나 무시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며 "부시 대통령이 관계 개선에 직접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FT는 20일자 사설에서 "부시 대통령이 볼리비아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라는 강경 보수파의 요구를 수용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 볼리비아는 혼란 예상, 좌파 도미노는 계속=내년에 중남미 국가 중 브라질.멕시코.콜롬비아.페루 등 9개 국에서 대선이 실시된다. 이들 나라의 좌파 정당은 한결같이'빈곤층 복지 확대'를 내세우고 있다. 모두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좌파 정권의 등장이 사태 해결의 종착점이 될 것 같지 않다.

외신들은 "모랄레스가 정권을 이끌기에는 준비도, 훈련도 돼 있지 않다"며 볼리비아의 정치 혼란을 점쳤다. FT는 "모랄레스가 이른 시일 내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볼리비아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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