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7)-한일회담(26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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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나는 현민 유진오선생의 집필(정회)에 이어 한일회담관계를 2백여회이상 기록해오는 동안 독자들로부터 지루하다는 충고와 객관적으로 잘 기술한다는 격려를 아울러 받았다.
나는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해 재미있는 기록쪽 보다는 사실에 충실한 기록을 남기려 애썼다. 특히 북송관계는 일본이 문명사회의 행동규범으로서는 유례없는 포거를 자행한 것이였음에도 피해자인 우리의 기록은 엉성하기 짝이 없는 사실을 고려해나는 그 교섭의 가능한 전모를 드러내려 노력했다.
그동안 졸고를 읽어준 독자들과 참고자료의 제공및 증언, 조언을 해준 친지여러분에게 새삼 고맙게 생각한다.
이 글을 끝맺으면서 나는 많은 감회에 사로잡혀 있다. 세계의 무수한 국가관계에서 한일관계만큼 불신과 증오, 오만과 침탈로 얼룩진 양자관계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기에 그 교섭 또한 양자관계로서는 외교사에 기록될 정도의 오랜 기간과 결렬의 늪속을 헤매야했다.
언론은 65년6월22일 한일회담조인식을 제2의 을사보호조약조인식으로 비판했고 나를 비롯한 교섭자들을 제2의 이완용쫌으로 치부했다. 언론의 그같은 보도는 당시의 국민감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나 또한 「국적」으로 몰아붙이는 세태를 몰라서 불만족한 교섭을 끝냈던 것은 아니다.
외교는 압도적 힘의 우위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서로 주고받는 타협의 산물일수 밖에 없으며 그 타협과정에서 기술이 발휘될 수 있으나 그에는 분명한 한계가 뒤따르는 것이다.
평형의 힘을 하루빨리 갖추기 위해 박정희대통령등 집권지도부와 나는 비판적 상황을 도외시한채 돌진했던 것이다. 최근 우리 어선이 일본 연안을 침범했다는 혐의로 나포됐다는 뉴스를 듣고 나는 정말 뭉클한 감회를 가누지 못했다. 20여년전의 상황이 적어도 바다에서는 역전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업회담때 나는 일본측에 선진기술을 가진 일본어선이 톤삭·척삭의 제한에도 마구잡이로 남획해 인류공동의 어업자원을 고갈시킨다면 우리후손들에게 죄가될 것이라고 경고한바 있어 더욱 흔쾌한 심정이다.
명년이면 한일국교정상화 20주년이 된다고 한일양국에서 기념사업을 한다는 보도를 보고 세월의 빠름을 새삼 느끼며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을 적는다.
내가 초대 주일대사를 마치고 주미대사로 부임하자 많은 미국인들이 앞으로의 한일관계에 관심을 표명해 나는 그때마다 단호하게 『우리 민족이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한 일제의 죄업을 어찌 망각할수 있겠는가. 그러나 국교가 정상화된 마당에 선인으로서 장래의 공동번영을 꾀함으로써 일본인의 과거를 용서한다는 의의를 가지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우리는 일제의 죄악을 「용서하되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과거를 망각해서는 안된다. 민족의 자주성과 긍지를 가지고 의연하게 일본인을 대하여야 하는데 근년에 그렇지 못한 일이 많아 마음 한 구석에 씁쓸한 감을 지을 수 없음은 나 한사람만의 소괴가 아닐것이다.
이와 관련해 전대통령이 이번 가을에 방일할때 일본천황은 일제시대에 관해 공식적으로 사과해야할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일본은 기본조약에서 과거의 조약이 당초부터 무효 (null and void)라고 주장한 우리민족감정을 수사적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행동으로 표현해야할 것이다. 나는 그 절호의 기회가 이번 전대통령의 방일때라고 생각한다.
또 협상의 어려운 고비마다 『명분을 타협하고 실리를 관철하도록 하자』고 나에게 누누이 강조했던 「사또」(좌등영작)일본수상의 말을 상기하면서 안완수장품등 민간소장의 우리문화재반환을 장려하겠다던 일본정부의 공약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한일양국정부는 실리의 관철을 위해 민간수장의 문화재반환등 한일제현안 해결에 진력해야겠다고 믿는다.
각설하고- 60년대 빈곤의 탈피와 조국근대화의 실현을 위해서는 대일국교정상화가 선행돼야한다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그러한 절정이 후세의 역사가 입증할 것이니 국내정치에서 일어나는 바람을 의식치 말고 밀고나가자는 20년전의 박대통령의 모습을 상기하고 나는 후회없이 교섭을 성공시켰다는 긍지를 가지고 이글을 맺고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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