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국회] '제한적 인터넷 실명제' 도입 찬성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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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은 얼굴 바꾸기의 달인? 인터넷과 마주하기만 하면 수만 가지의 얼굴로 변하는 야수! 혹시 당신의 모습은 아닙니까?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누군가에게 무례하게 한 적은 없습니까? 이제 가면을 벗으세요. 당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구는 한국광고방송광고공사 소속 공익광고협의회가 인터넷을 올바로 사용하자는 취지로 벌이고 있는 '인터넷 예절 캠페인'의 내용이다. 필자는 매일 아침 7시30분쯤 자동차 속에서 라디오를 통해 남자목소리로 된 이 내레이션을 듣고 있다. 오후에도 들을 수 있는 것을 보면 하루에도 몇 차례 방송되는 모양이다.

공익광고협의회는 몇달 전 TV에서도 같은 내용의 캠페인을 벌였다. 라디오는 목소리만 들리므로 그런가 보다 싶지만 TV는 화면으로 나타나므로 받아들이는 감각이 좀 달라진다. 어떤 모습을 찍어서 내보내느냐에 따라 효과를 거두느냐, 못 거두느냐가 결정된다.

그런데 TV캠페인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장면을 보여주었다. 얼굴이 예쁜 한 여성이 웃는 표정을 지으며 인터넷을 하다가 갑자기 괴이한 웃음을 터뜨리며 야수로 변하는 장면이었다. 이 여성은 헬로윈, 늑대, 호랑이, 여우 등 9가지의 가면을 번갈아 쓰고 있다. 어린이가 보면 기절초풍을 할 정도였다.

딱 30초 짜리인 이 광고는 화면이 나가는 동안 자막에 「네티즌은 '얼굴 바꾸기'의 달인?」이라는 문구가 나오고 '가면을 벗으세요. 인터넷 예절. 당신의 얼굴입니다.'라는 여성목소리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인터넷 예절을 지키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네티즌들의 항의가 많았던 탓인지 지금은 이 TV광고가 없어지고 협의회 홈페이지에서만 볼 수 있다.

정부는 그동안 인터넷공간에서의 카오스적인 현상을 없애자는 뜻에서 '인터넷 실명제'를 추진해왔다. 마침내 내년부터 대형포털 사이트에 대해 의무적으로 본인확인을 거치는 '제한적 실명제'가 도입되고, 모든 포털사업자들은 당사자의 동의 없이도 명예훼손이나 비방 등의 내용이 담긴 글을 삭제할 수 있게 된다는 소식이다. 정보통신부는 지난 19일 개최한 '건전한 사이버 환경조성을 위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공청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공개했다.

개정안을 보면 포털의 게시판 이용자들은 반드시 본인 확인절차를 거쳐야 하며, 실명을 쓰기 싫은 사람들은 별명이나 필명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실명제 대상으로 선정된 포털사이트가 이용자의 본인 확인절차를 소홀히 할 경우 시정명령을 내리거나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인터넷 게시판 정보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포털사업자에게 삭제요청을 할 경우 최종적인 법적 판단이 있기 전이라도 임시로 이용자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당사자의 요청이 없어도 '선의'로 게시물을 삭제한 경우 법적 책임을 면제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조항을 마련해놓아 관심을 끌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 조항이란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다가 예기치 않은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없을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을 말한다. 현재 미국 연방통신품위법에서 채택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관련법 개정으로 포털사업자가 피해구제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내년 초 국회에 제출해 통과되는 대로 시행된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시민단체는 '제한적 실명제도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고, 특히 포털 운영자가 자의적으로 게시판 글까지 삭제하도록 한 것은 사전 검열권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반발하고 있어 법안확정까지는 진통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해 정통부 측은 '사이버언어폭력, 명예훼손 등 인터넷 역기능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용자의 자기책임의식을 제고하고 피해구제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며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심각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한적 인터넷 실명제'에 대해 네티즌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국내 최다 회원을 자랑하고 네이버가 지난 9월12일부터 한달 동안 실시한 인터넷폴에서 참여자 4천947명 가운데 「제한적 실명제」 찬성 41.3%(2천42명), 「전면적 실명제」찬성 34.9%(1천728명, 「실명제 반대」23.79%(1천177명)으로 집계되었다. 결국 76.2%가 어떤 형식으로든 실명제를 해야 한다는 쪽에 손을 들었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대부분의 네티즌들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실명제가 실시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 본인확인 절차를 거치게 됨으로써 개인정보가 침해될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지난 달 서울 YMCA가 일반시민과 청소년 등 2천7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는 눈여겨볼 만하다. '게시판 실명제 의무화가 시행되면 개인정보 침해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가운데 72.6%가 '그럴 것 같다'고 했다. '그럴 것 같지 않다'고 답한 사람은 23.6%에 지나지 않았다.

한림대학교 법학부 황성기 교수 같은 분은 '인터넷 실명제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 위헌소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 강제력을 동원해 실명으로만 의사를 표현하도록 하게 되면 '위축효과'가 나타나 결국은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불가능해진다'면서 '이는 헌법에 명시돼 있는 '표현의 자유'에 역행한다'는 것이 황교수의 생각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앙일보는 오늘(21일) 신문 사설에서 '익명의 인터넷 공간에서 험담과 욕설이 난무하면서 인격살인을 당하기 일쑤다. 진실은 내팽개쳐진 채 소문과 추측만으로 순식간에 사회적 매장을 당한다. …터무니없는 댓글로 인한 사회적 폐해가 너무 크다. 이는 표현의 자유를 넘어서는 일탈이다. 대형 포털사이트에 국한된 제한적 인터넷 실명제는 시작에 불과하다. 정부는 인터넷상의 실명제 도입 범위를 더 넓혀가야 할 것이다. 인터넷을 불법과 무질서가 판치는 공간으로 방치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인터넷이 불법과 무질서의 공간이 된 데는 무엇보다도 비대면성(非對面性)이라는 특징 때문이다.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고 게시판에 글을 올리거나 상대방과 대화를 하기 때문에 표현에서 매우 자유로워진다.

온라인의 비대면성은 오프라인에서의 자아와는 다른 성격의 다중자아(多衆自我)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현실에서 폭력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은 인터넷공간에서 더욱 과격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몇 전문가나 일부 네티즌들은 사이버폭력의 주요원인은 '비대면성'이지 '익명성'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인증을 해야 하는 포털사이트에서도 사이버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은 사용자가 실명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인터넷 실명제를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모두 옳은 말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문제는 인터넷세상이 건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이버공간이 이토록 어지러워진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네티즌들의 책임이다. 그 책임을 네티즌들이 져야 한다. 인터넷공간이 불과 10년 사이에 이처럼 크게 오염된 것도 모두 네티즌들 때문이고.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했음도 모두가 아는 일이다.

당국에서 시행하려는 인터넷 실명제가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제한적인 것인 만큼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사이버공간이 더 이상 비난과 비방, 인격살인으로 얼룩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클린 인터넷'만이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약속 받는 덕목임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이다.[디지털국회 이재일]

이 글은 인터넷 중앙일보에 게시된 회원의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중앙일보의 논조와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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