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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산책] "스위스 얕보다간 큰 코 다쳐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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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부근의 한 카페 앞에서 포즈를 취한 서정원.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선수답게 여유와 웃음이 넘쳐난다. 최정동 기자

"독일월드컵 조 추첨하는 시간에 저는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 있었어요. 인천공항에 내려서 사람들한테 결과를 물었더니 '스위스와 한 조가 돼 잘 됐다' 그러는 겁니다. 저는 '어이쿠, 큰일났다. 하필이면 스위스냐' 싶었어요. 스위스 얕보다간 큰 코 다칩니다."

서정원(35.SV 리트)은 독일월드컵 걱정부터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그는 전기리그를 끝내고 한 달 일정으로 귀국했다. 그는 스위스가 무서운 이유를 '팀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럽 팀들에는 대부분 몇몇 수퍼 스타가 있어요. 그들이 전력에 큰 도움이 되긴 하지만 팀 분위기를 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스위스는 '잘난 선수'가 없는 대신 묵묵히 팀을 위해 희생하는 살림꾼들이 많아 조직력이 정말 뛰어납니다. TV로 월드컵 예선을 봤는데 수비와 미드필드가 꽉 찬 느낌이 들었어요."

프랑스 리그의 스트라스부르에서도 뛴 적이 있는 서정원은 "차라리 프랑스가 해볼 만하다. 주눅 들지 않고 우리의 강점인 스피드와 조직력을 살려나가면 된다"고 했다.

'날쌘돌이' 서정원이 만나자고 한 카페 이름은 '느리게 걷기'였다. 별명과 카페 이름의 묘한 대비를 말하자 그는 크게 웃으며 "운동장에선 빠르지만 밖에 나가면 느리잖아요"라고 했다. 말 그대로 서정원은 느릿느릿,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1990년 이탈리아, 94년 미국, 98년 프랑스월드컵에 출전했다. 2004년 플레잉코치로 뛰면서 수원 삼성의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서른다섯의 나이에 훌쩍 오스트리아로 건너갔다. 잘츠부르크에서 12경기를 뛰었고, SV 리트로 옮겨 2005~2006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전기리그 22경기에 모두 출전해 7골(득점 6위)을 기록했다. 15일 오스트리아 유력 일간지 '쿠리어'는 서정원을 '올해의 최고선수'로 선정했다. 스포츠 주간지 '슈포르트보헤'도 서정원을 평점 1위에 올려놨다.

인구 1만5000명의 소도시 리트에서 서정원은 '유명 인사'다. 식당에 가면 밥값을 받지 않고, 골프장 주인은 "아무 때나 와서 마음껏 즐기고 가라"고 한다. 오스트리아 언론은 서정원이 '당연히' 국가대표인 줄 알고 독일월드컵에 임하는 각오를 묻는다. "나보다 잘하는 선수가 한국에 많기 때문에 지금은 대표가 아니다"라고 대답하면 깜짝 놀란다.

그는 장수 비결을 '몸에 밴 절제'라고 답했다. 술은 체질상 못하고, 담배는 물론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멋진 골을 넣고 경기에 이긴 뒤에는 늘 자신에게 말한다. '오늘은 끝났다. 내일이면 이 모든 게 추억으로 잊혀 간다. 지금부터 다시 준비해야 한다'. "꼭 안 가도 될 자리면 가지 말고, 두 번 갈 자리는 한 번만 가자는 원칙을 세웠어요. 처음에는 힘들지만 이젠 자연스러워졌죠."

서정원의 생활 중심은 가족이다. 7남2녀의 막내인 그는 국내에 있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남한산성에 있는 본가에 대가족이 모였다고 한다.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조카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활력이 충전되죠." 오스트리아에서는 틈날 때마다 체코로, 독일로 가족 여행을 했다고 한다.

서정원은 18일 홍명보 자선축구경기에서 펄펄 날아다니며 두 골을 넣었다. 수비 세 명을 따돌리고 꽂아넣은 골은 '베스트 골'로 선정됐다. "서정원을 대표팀에 뽑아라"는 목소리가 점점 힘을 얻고 있다. 그가 대표팀에 뽑힌다면 '띠동갑'보다 한 살 적은 조원희(22.수원 삼성)와 경쟁하게 된다. 그는 "나라에서 불러주신다면 당연히 가야죠. 그렇지만 누구와 경쟁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맏형으로서 후배를 다독이고 안정감을 줄 수 있다면 제 역할은 다 하는 셈이죠"라고 말했다. '저 나이에도 국가대표에 뽑힐 수 있구나'라는 모범을 보여줄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고 한다.

서정원은 '실력.인성.경험을 갖춘 지도자'를 꿈꾼다. 오스트리아로 간 이유도 사실은 지도자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현역에서 은퇴하면 유럽에서 최소한 3년은 눌러앉아 공부를 할 계획이다. 날쌘돌이의 '느리게 걷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영재 기자<jerry@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 서정원은

▶생년월일=1970년 12월 17일

▶체격=1m73cm.67kg

▶가족=부인 윤효진씨와 3남(동훈.동재.동한)

▶출신 학교=남한산초-연초중-거제고-고려대

▶소속 팀=럭키금성(안양 LG)-스트라스부르-수원 삼성-잘츠부르크-SV 리트

▶대표 경력=1990.94.98 월드컵 대표, 92 바르셀로나올림픽 대표, A매치 86경기, 16골

▶프로 경력=1999.2001.2003 K-리그 베스트 11, 269경기 출전, 68골.25도움

▶취미=여행, 음악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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