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병까지 샴푸 못 쓰는 해병 … 간담회 소통으로 악습 없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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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저는 뚱보였습니다.”

 성균관대 3학년 최규서(24)씨는 2011년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과체중으로 3급을 받았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해병대 출신이어서 자연스레 해병대를 꿈꿨다. 이를 위해 그는 6개월간 25kg을 감량했다. 한 번도 못했던 팔굽혀펴기는 1분에 40개로 늘렸다. 그토록 바라서 간 해병대였지만 그는 곧 실망했다.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군대의 권위주의 문화 때문이다.

 갓 일병을 단 그는 중대장에게 ‘용감한’ 제안을 했다. 매주 전 사병이 모여 간담회를 하고 거기서 나온 의견을 내무생활에 반영하자는 거였다. “처음엔 ‘고참들’의 눈총도 많았죠. 그런데 회를 거듭할수록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상병이 돼야 샴푸를 쓰고 헬스장을 사용할 수 있던 ‘계급 차별’ 악습이 없어졌다. 최씨는 “소통의 장이 열리면서 구타와 가혹행위 등 폭력적인 문화가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최씨는 소통의 중요성을 공유하기 위해 본지와 중앙선관위가 공동주최한 ‘강연 콘테스트’에 참가했다. 지난 2일 오후 결선 대회가 열린 코엑스(서울) 콘퍼런스룸. 500여 객석이 가득 찬 무대에 올라섰다. 가만히 청중을 둘러보던 그가 어린 시절 사진 한 장을 스크린에 띄웠다. 조용했던 객석에 폭소가 터졌다. “초등학교 6학년 회장선거 때 모습입니다.” 잇따라 비만이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슬라이드로 보여줬다.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농담으로 청중의 마음을 움직인 그가 이번엔 굵고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물었다. “저는 학생회장에 세 번 도전했습니다. 재수 끝에 중·고교 회장이 됐는데요. 비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최씨는 “처음엔 피자나 치킨으로 환심을 사려 했다. 나중엔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요한 뭔가가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대신 친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으며 지키기 힘든 공약은 철회하고 말만 앞선 구호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할 수 있는 게 뭔지 솔직히 얘기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선 후엔 학생과 교사가 참여하는 공개토론을 다섯 차례 열어 두발자유화를 이끌어 냈습니다.”

 최씨는 이날 강연으로 대상(일반인)을 수상했다. 김홍신 심사위원장은 “일상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심 어린 소통의 중요성을 재미있게 강의했다”고 평가했다. 이 대회는 본지 창간 50주년 어젠다인 ‘참여하고 책임지는 시민’ 문화를 널리 확산하고 ‘유권자의 날(5월 10일)’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됐다.

 최우수상은 평범한 30대 가정주부가 차지했다. 김은지(32·여)씨는 “마트에서 꼼꼼히 물건 고르듯 선거에서 제대로 투표하자”고 주장했다. “엄마들은 냉장고 안쪽부터 뒤집니다. 안쪽의 우유가 유통기한이 4일 정도 길기 때문입니다.” 김씨는 “3000원짜리 우유도 4일의 미래를 보고 산다”며 “4년의 미래를 책임지는 선거는 더욱 꼼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은 대신 봐줄 수 있지만 선거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며 “마트 전단 보듯 선거 홍보물을 살펴보자”고 제안했다.

 권위적인 경상도 아빠와 딸의 이야기로 가정 내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운 이남미(32·여)씨와 이주여성의 선거권 문제를 연극으로 표현한 ‘이주여성팀(왕지연씨 외 5명)’ 등은 장려상을 받았다.

 청소년부에선 간식을 잘 돌리는 학생을 회장으로 뽑았다 후회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연극과 합창으로 표현한 정의여고 2학년생들이 대상을 받았다. 이 학교 김경빈(17)양은 “과거 민주화를 위해 많은 분이 피 흘렸는데 정작 우리는 권리를 갖고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풍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학교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의 깨어 있는 의식을 강조한 용인외고 학생들이 최우수상을, 대통령 선거일의 여러 풍경을 뮤지컬로 표현한 서울방송고 학생들은 우수상을 받았다.

 중앙선관위 김대년 사무차장은 “선거라는 훌륭한 제도가 있어도 시민들이 깨어 있어야만 민주주의가 바로 선다”며 “참여하고 책임지는 시민이 많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사진 설명

최규서(맨 왼쪽)·김은지(맨 오른쪽)씨는 군대와 마트 등 일상 속 시민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해 각각 일반부 대상과 최우수상을 받았다. 정의여고(대상·가운데 왼쪽)와 옥천고(장려상·가운데 오른쪽)는 합창·연극 등 다양한 공연으로 투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진 중앙선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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