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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평론가 다른 눈으로 영화 읽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25호 32면

저자: 강신주ㆍ이상용 출판사: 민음사 가격: 3만3000원

“특정 시대에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 모든 면에서 완벽히 시대에 묶여 있는 사람은 동시대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시대를 쳐다보지도, 확고히 응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씨네샹떼』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쓴『벌거벗음』의 한 대목이다.『씨네샹떼』는 여기서 ‘사람’이라는 단어를 ‘영화’로 바꾸었다. 어떤 작품을 보더라도 결국 동시대를 이야기하게 되는 영화의 숙명이랄까.

공저자인 철학자 강신주와 영화평론가 이상용은 영화적 아름다움 위에 시간의 퇴적층이 쌓인 작품 25편을 신중하게 골랐다. 동시대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시차가 만들어내는 틈이 필수적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책은 지난해 7월부터 올 1월까지 6개월간 CGV 아트하우스 압구정에서 열린 강의에 대한 기록이다. 함께 영화를 보지 못한 독자를 위해 단편소설 같은 시놉시스를 싣고, 관객과 나눈 질의응답 내용을 토크 형식으로 세밀히 옮겨적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미덕은 영화를 읽어내는 서로 다른 눈에 있다. 평론가는 영화에 깊이를 더하고 철학자는 그 외연을 넓힌다.

비주얼 리터러시에 대한 담론은 시기적으로도 적절하다. 영화는 탄생부터 곧잘 양자 택일의 순간을 맞닥뜨렸다. 만화경처럼 혼자 볼 수 있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와 대중이 모여서 보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는 그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승자는 뤼미에르 형제였다. 촬영과 영사 기능을 겸한 시네마토그라프가 영사 기능에만 초점이 맞춰진 키네토스코프를 누르고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관람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잊혀진 방식은 다시 소환됐다. 대중이 함께 보는 영화에서 개인이 혼자 보는 영화로 소비 방식이 분화하고 있는 셈이다.

표현 방식의 승부는 기기보다 한층 치열하게 이뤄진다. 오스트리아 화가 클림트가 프랑스 체류 당시 멜리에스 영화에 빠져 영화를 만들 것인가, 그림을 계속 그릴 것인가 했던 고민은 영화사 전체에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철학자는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를 재현과 표현으로 설명한다. 자신이 본 세상의 인상을 재구성하는 쪽과 주변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 주목하는 쪽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영화의 발전을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보다 사실적으로 보이기 위해 비전문배우를 선호하는 로베르토 로셀리니 같은 감독이 있는가 하면, 사실적 재현이 아니라 진실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되려 인위적이어야 한다는 장 르누아르 같은 감독도 있다.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양쪽 다 웬만한 다큐멘터리보다 더 있는 그대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변주하는 영화의 흐름을 꿰어내는 것은 평론가의 몫이다.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시대의 정점을 찍은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를 통해 공포의 대상과 이를 제압할 영웅의 필요성을 읽어내고 히틀러가 탄생하기까지 배경을 짐작하는 식이다. 이는 장르적으로는 미국 필름 누아르로 이어져 공포 영화와 범죄 영화를 경유하며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들을 마주하게 만들었고, 내면적으로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는 히어로에 대한 갈망 및 그 속에 숨겨진 무의식과 연결된다. 다시 전쟁이 끝난 1960년대 가해자와 피해자, 중립이었던 각 나라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상처를 보듬었던 것처럼 영화는 다른 듯 닮고 분절된 듯 이어진 역사를 갖게 된 것이다.

테크놀로지(1895~1936), 사려 깊은 의미(1939~1959), 욕망의 발산(1960~1972), 불안한 영혼(1974~2004). 4개의 시기로 구분했지만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이어지는 것도 그 덕분일 터다. 880쪽에 달하는 결코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단숨에 읽어내려가기 보단 모르던 영화를 찾아보며 음미하는 편이 훨씬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성찬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도전해 볼만 하다.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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