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최초의 상륙전벌인 통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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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남해의 건널목을 장악하라』-.
6·25당시 인천상륙작전보다 한달 앞서 남해의 건널목 통영반도에서 우리해병이 단독으로 전격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적의 손에 떨어진 충무시를 탈환하고 거제도를 돌아 부산교두보를 옆구리서 위협하려던 적의 기도를 분쇄한 해병의 용전은 전사에만 기록된채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사.

<3일간 밤·낮 격전>
경남충무시 원문고개는 바로 그 상륙작전의 승부를 결정지은 사흘밤낮격전의 현장.
『바로 이 등성이에 2개중대가 참호를 따고 적2개대대병력과 맞붙였습니다. 보시다시피 양쪽이 바다인 좁은 길목의 병목에 위치한 고개아닙니까. 이 고개를 먼저 점령했기에 상륙작전이 최소의 희생으로 성공할수있었던 거지요』

<년 3백만불 수출>
당시 해변1등수조로 상륙작전에 참가했던 해병1기 안석의씨(56·경남충무시) 는 감개어린 표정으로 그날의 격전장을가리킨다.
화강석전적비가 세워진 언덕배기 2천1백평의 경내주변은 위쪽으로 잔솔밭, 아래쪽은 밭을 일구었다.
고개아래 고성과 충무가 개미허리로 이어지는 지협을 S자로 굽이도는 당시의 자갈길 외길도로는 이제 말끔한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바뀌어 각종 차량들이 꼬리를 풀고 달린다.
그날 해군함정이 불을뿜던 바다는 이제 곳곳이 굴양식장.
여기서 생산된 굴은 대부분 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연간수출고가 3백여만달러.
우리해병이 이 통영반도에 상륙한것은 50년8월17일.
낙동강선까지 밀린 국군이 부산교두보 사수에 총력전을 펴먼때였다.
전선의 전역에서 방어선들과에 발악하던 적은, 국군의 반격으로 공세가 둔화되자 일부병력을 고성에서 통영반도로 우회, 남하시켜 충무를 점령했다.
3백m폭 견내량을 건너면 거제도.
거제도가 적의 손에 들어가게되면 마산·진해는 적의 사정권안에놓인다.

<조직적인 작전펴>
부산교두보가 옆구리서 위협을 받게된다.
통영상륙작전은 이같은 위험을 재거하기위해 우리해병· 해군·공군이 연합·단독작전을 감행했던것.
8월17일부터 22일까지닷새동안의 작전에는 해병1개대대 (김성은부대)가 투입됐다.
해군과 공군은 함포사격과 공중포격으로 상륙해병을 엄호했다.
6·25개전후 처음인 조직적인 작전·적극적인 공격끝의 대승이었다.

<어둡자 다시 습격>
『이곳 원문고개에서는 19일하오부터 22일상오까지사흩밤낮 적전이 벌어졌습니다. 17일 하오6시쯤 장평리 해안에 상륙한뒤2개중대는 충무시내로 진격하고 2개중대는 이곳원문고개로 진출, 이튿날새벽 이곳을 점령했는데 그날 하오부터 1천여명의 적이 충무시내에 갇힌 6백여명의 동료를 구원하기 위해 고성쪽에서 공격을 해왔어요.』
고지를 점령한 해병의사격에 언덕을 기어오르던 적은 패주했으나 밤이 되자 어둠을 이용, 다시 습격해왔다.

<적들은 까까머리>
『앞이 안보이는 어둠속에서 수류탄과 대검으로 육박전을 벌였습니다. 적군은 모두 머리를 깎고있어서 머리를 만져보아 까까머리면 찌르고 했어요』
22일상오 적이 충무를 완전히 포기하고 패주한다음 고개마루에 널린 것은 적의 시체로 확인된 숫자만 4백69구, 포로 83명
포로중에는 적의 중좌1명도 끼여있었다.
충무시내에 들어왔다가 섬멸된6백여명까지 합하면 1개대대가 적 1개연대를 무찌른 전과였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15명, 부상47명.

<해병들의 성지로>
『그때 전사한 전우들을 여기 솔밭아래 함께 묻었어요. 나중 국군묘지로 이장했읍니다만 그들이 흘린 피로 이곳은 우리 해병에게 영원한 성지가 됐읍니다.』
그날의 격전장에 7년해병전적비가 세워졌다.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이 불을 뿜었던 산야와 바다는그날의 증오와 살육의 흔적도없이 평화롭기만하다.

<통영 문병호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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