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 코뮤니즘」에 조종 울릴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지난 11일 이탈리아의 공산당서기장 「엔리코·베를링게르」가 사망하면서 70년대 중반 정치유행어로 풍미하다 사라지다시피 했던 유러코뮤니즘이란 말이 다시 한번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베를링게르」의 사망 훨씬 전부터 유럽공산주의가 서구정치무대에서 정치적인 이념과 운동으로서의 역할이 퇴색해왔지만 그 기수라고 할 수 있었던 「베를링게르」없이 70년대와 같은 활기를 되찾기는 더욱 어렵게됐다.
그래서 서독의 보수계 신문인 디 벨트지는 『「베를링게르」의 장례식은 곧 유러코뮤니즘의 장례식』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유럽공산주의가 정치용어로 등장한 것은 서구의 지배적인 공산당인 라틴계 국가인 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공산당이 소련공산당으로부터의 독립을 표방하기 시작한 70년대 중반부터였다.
당시 유럽공산주의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이탈리아와 프랑스공산당의 정권참여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기존정치세력, 특히 미·서구의 보수세력이 경계하기 시작했던데 연유되고있다.
당시 이들은 소련의 공산체제와는 달리 이른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포기하고 복수정당제도에 의한 대의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정책노선을 밝혔었다.
그들의 이러한 정치운동이 절정을 이루었던 것이 1976년 동베를린에서 있었던 유럽공산당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서구공산당들은 소련블록의 반대를 물리치고 『모든 나라의 공산당들은 자기나라의 특수한 상황에 따라 행동할 수 있으며 각 공산당간의 불간섭원칙이 존중돼야한다』고 천명했다.
원칙 면에서 서구공산당들은 의견을 같이했으나 실제 행동 면에서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베를링게르」의 경우 「현 실정에서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타협적인 태도를 보인데 반해 프랑스의 「마르셰」와 스페인의 「카르리요」당수는 그 전제를 부정했다.
이들 공산당들의 의견분열은 그렇지 않아도 「프롤레타리아독재 포기」의 진의에 대해 의아심을 갖고있던 서구시민들을 더욱 당혹하게 해, 특히 「베를링게르」의 경우 그 주장이 집권을 위한 위장전술이 아닌가하는 불안을 갖게 했다.
이러한 의구심들은 70년대 말에 이르러 유러코뮤니즘을 퇴조하게 만드는 주요한 이유가 됐다.
복수정당제 프롤레타리아독재 포기라는 것이 실상은 공산당의 집권을 위한 일시적인 책략이며 집권 후는 곧 소련식 집단주의체제를 수립할 것이라는 회의를 많은 사람들이 갖게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럽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은 유럽을 소련화 하기 위한 전술적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이 때문에 서구의 공산당세력들은 이탈리아를 제외하곤 선거 때마다 득표율이 떨어져 최근에 이르러 유러코뮤니즘이란 정치용어가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었다.
극단적인 예가 지난 17일 실시된 유럽의회선거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전체 4백34개 의석중 79년 선거때 48석을 차지했던 공산당은 5석이 줄어들었다.
이탈리아에서만 「베를링게르」의 사망에 따른 추모표가 작용, 33·3%로 이탈리아의 기민당을 앞섰으나 프랑스의 경우 79년의 20·5%에서 11·3%로 거의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스페인의 경우 아직 EC에 가입하지 않아 이번 선거에 참패하지 않았으나 78년의 국내선거때 23석을 차지했던 공산당은 82년 선거때 절반이 줄어든 12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베를링게르」는 이처럼 유럽공산당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을 때 사망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뿌리깊은 가톨릭 세력과 보수세력에 대해 「역사적 대화합」을 제의하며 서구식 민주주의원칙에 따라 집권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공산주의자로서의 근본이념은 그대로 간직한 인물이었다.
비록 「베를링게르」가 현재의 소련체제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해오기는 했으나 미국등 자본주의사회와 비교할 때는 그래도 공산체제가 우월하다고 주장해온 사람이었다.
그런 면에서 서구사회 지도자중의 하나였던 「브루노·크라이스키」전오스트리아수상의 『「베를링게르」의 유러코뮤니즘은 당초부터 실패할 운명을 타고났었다.
그가 여러 가지 수단을 갖고 서구민주주의와 타협하려고 시도는 했지만 동구의 공산주의이념의 터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말은 유러코뮤니즘의 장래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본=김동수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