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강단에 서는 감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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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4년이란 세월이 한 사람의 일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하찮을지 모르지만 괴롭고 쓸쓸히 보낸 사람으로서는 10년에 버금 할만큼 지루하고 긴 세월일 수도 있다.
4년 전 교직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을 때 가슴이 멎는 아픔을 경험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20년간 한눈팔지 않고 줄곧 봉직해왔던 교직에서 물러나야만 한다는 것은 물에서 살던 고기가 뭍으로 내몰린 것과 흡사한 심정이었고, 달리 살아갈 방도를 찾을 길 없는 사람으로서는 참담하고 암울할 따름이었다.
더욱 뼈저린 체험은 당시 국민학교 3학년이던 막내녀석이 학교에서 돌아와 『아버지 왜 학교에 안나가셨어요?』라고 했을 때 무어라 답변할 말이 없어 어물 쭈물 얼버무렸던 일이다.
또다시 그런 물음을 당할까 두려워 그녀석이 학교갈 무렵이면 옷 갈아입고 동네를 한바퀴 돌고 오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뒤에도 그런 물음에 맞닥뜨릴 계기가 있었는데도 그런 물음을 다시는 하지 않았는걸 보면 그녀석이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차마 내 입으로 교직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못할 판이었는데 오히려 눈치챈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부질없이 동네를 한바퀴 돌아야하는 번거로움은 덜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편 철부지로만 알았던 그녀석이 아버지의 마음 상하지 않게 하려고 애쓴 것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언론계에 계시다가 나보다 훨씬 오래 전에 해직된 선배 한 분으로부터 곧잘 위로와 충고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해직되고 3년이 지나야 마음의 평온이 온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득하게만 느껴지더니 어느 결에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마음의 평온은 커녕 오히려 줄곧 마음이 뒤흔들릴 뿐이었다. 아예 학교로 돌아가길 체념했으면 마음의 평온을 찾았을는지 모르지만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이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있었으니 쉽사리 체념할 수도 없었지만 그보다도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복직이 되리라는 허튼 소문 때문에 마음은 들뜨기 마련이었다.
4년 동안 되풀이되는 허튼 소문 때문에 도시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없었다.
「실망하지 않는 최선의 길은 기대하지 않는데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결단코 헛소문을 듣고 믿지 않으리라 다짐도 했지만, 헛소문이 나돌면 부질없이 또 귀를 기울이게 되는 마음을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었다. 인간이란 원래 자기와 관계되는 일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서 믿으려드는 동물임을 새삼 깨닫게되었다.
그러나 허튼 소문에도 면역이 되는 것을 느꼈다. 허튼 소문에 들뜬 주책스러움에 몇 번이나 스스로 얼굴을 붉히다보니 결단코 믿지 않으리라는 작심을 하기에 이른 것 같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우화 한 가지가 생각키운다. 이리가 내려와 자기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번번이 거짓으로 외쳐대던 소년이 하루는 진짜로 이리가 내려와 자기를 잡아먹으려 하는데도 하도 속아온 동네사람들이 구해주질 않아 큰 일을 당하고 말았다는 우화 말이다.
이번 나의 경우는 반대의 경우이지만 실상 보름 전에 또다시 복직에 관한 달콤한 소문이 나돌아 결단코 안믿으려 했는데 이번에는 사실로 밝혀진 셈이다.
지난해 12월6일 당국에서 원래 봉직하던 대학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밝혔을 때 당국이 일을 너무나 꼬이게 만들고 호도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명령을 내리는 법적 근거는 있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솟구쳤다. 내가 알고있는 얄팍한 법률상식을 동원하고 아는 변호사들에게 문의해 보아도 그러한 명령을 내릴 법적 근거는 없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법치주의가 기본인데 법적 근거도 없이 자유로이 직업을 선택할 기본권을 유린할 수 있는 것인가. 오히려 다행했던 것은 이것을 계기로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면 자구책이 마련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 어려움에 부닥친 것은 법적인 소송을 제기할 당사자란 내가 봉직하고 있었고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학교라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꽁지의 비밀로 되다시피 했지만 쫓겨나 있던 지난 4년간 학교당국은 남몰래 해직교수들에게 정신적인 위로와 물질적인 보탬을 주려고 애써왔음을 나는 익히 알고있었다.
그리고 학교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나와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던 동료교수들의 애틋한 정을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한 분의 선배교수는 1871년 파리코뮌사건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던 「빅토르·위고」를 자임하고 나서기조차 했다.
그런가하면 나의 하찮은 가르침을 받았다는 인연 때문에 수많은 졸업생들이 지난 4년 동안 잇따라 찾아주는 바람에 스케줄을 짜기가 바빴을 정도였다.
우스운 얘기지만 『업자 (실자를 빼고)되시더니 더 바빠지셨다』는 말을 수없이 들을 정도였다.
솔직히 내가 봉직하고 있던 학교로 해서 받은 온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학교를 상대로, 그것도 자의로 나를 쫓아낸 것도 아닌 그 학교를 상대로 법적인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를 이기주의자요, 인륜을 저버린 자로 타락시키는 결과로 될 수밖에 없으니 그것도 못할 짓이었다.
4년이란 세월, 어둡고 괴로우며 지루하고 억울한 시간이었다.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괴로움에서 시달리고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안겨줄 날이 속히 다가오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이렇듯 마음이 멎는 한이 맺히지 않는 시대가 되고 사회가 이룩되길 두 손 모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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