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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동전주차기 실종사건 … 범인은 핀테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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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 지난 20일 오후 5시 영국 런던의 중심가인 세인트조지스트리트 노변 주차장에 차 한 대가 멈췄다. 운전석에서 내린 조너선 딕슨이 길가에 있던 표지판쪽으로 가더니 휴대폰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뭐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주차요금을 내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제서야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주차단말기가 눈에 들어왔다. 딕슨은 ‘파크라이트’(parkright)라는 스마트폰 앱에 단말기 고유번호를 입력해 주차요금을 결제하던 중이었다. 알고 보니 이 앱은 동전주차기를 런던 중심가 노변주차장에서 퇴출시킨 ‘영국 핀테크’의 상징적 존재였다. 딕슨은 “앱 덕택에 동전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져 주차요금 결제가 매우 편리해졌다”고 말했다.

 # 환락과 휴양의 섬으로 유명한 스페인 이비자섬의 우수아이아(ushuaia) 호텔에는 특이한 물건이 하나 있다. 언뜻 카드결제기처럼 보이는 이 물건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상용화된 지문인식기다. 기계에 두 손가락을 대면 체크인·체크아웃·룸서비스 등이 모두 가능하다. 시스템을 개발한 스페인 투셰(Touche)사의 사바 생클레어 최고경영자(CEO)는 “앞으로는 카드나 현금, 신분증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진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유럽의 핀테크(Fintech) 현장은 활화산이 되기 직전의 휴화산 같았다. 핀테크 대중화가 그리 멀지 않은 듯한 분위기였다. 이미 상용화된 몇 가지 기술들은 핀테크로 인해 달라질 미래의 모습을 미리 엿보게 해줬다.

영국·스페인에서 사용 중인 핀테크 기술. 영국 핀테크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주차요금 결제용 파크라이트 앱(사진 왼쪽), ② 주차단말기 고유번호(오른쪽).
주차단말기의 전체 모습.

 영국은 대표적인 핀테크 선진국이다. 핀테크는 기존 금융인프라 제공업 등의 ‘전통 핀테크’와 신기술로 시장을 혁신시키는 ‘신생 핀테크’로 나뉜다. 우리가 흔히 말하고, 주목하는 분야는 신생 핀테크다. 이장균 여신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이 작성한 ‘영국지급결제 및 핀테크 산업의 이해’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은 2013년 기준 핀테크 분야 총수입 200억 파운드 중 ‘신생 핀테크’의 비중이 18%에 이른다. 매우 높은 수치다. 유럽의 핀테크 관련 신생 벤처기업(스타트업) 중에서도 절반이 영국 기업이다.

 파크라이트 앱은 영국 핀테크의 대표적 성공사례다. 이용자는 앱을 내려받은 뒤 자신의 계좌나 신용카드와 연동시킨다. 이후 앱을 구동해 주차 희망 지역의 이름을 입력하면 인근의 주차구역들과 주차 가능대수가 실시간으로 확인된다. 주차 후 주차단말기에 표시된 위치 번호를 앱에 입력하면 자동으로 결제가 이뤄진다. 런던 중심가 대부분의 노변 주차구역 단말기는 이처럼 앱 또는 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전통적 동전주차기는 이미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곳에 주차한 마크 필립스는 “동전주차기는 주차 시간을 연장하려면 일일이 단말기에 돌아와 동전을 집어넣어야 했는데, 이제는 주차시간 연장도 앱으로 쉽게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대표적 모바일 간편결제 시스템인 ‘페이팔‘의 오프라인 활용도도 한국보다 높았다. 런던의 초대형 쇼핑몰인 웨스트필드 쇼핑몰 주차장 단말기에서는 페이팔로 요금을 결제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에 페이팔 앱을 다운받은 뒤 단말기에 바코드를 인식시키는 시스템이다. 식당에서도 모바일로 결제하는 청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다.

 영국 핀테크 활성화의 배경에는 민·관의 대대적 지원이 깔려있다. 영국 정부는 벤처기업과 엔젤투자자들에 대한 감세 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금융감독원(FCA) 산하에 ‘프로젝트 이노베이트’라는 테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핀테크 육성을 저해하는 규제들을 개선하고 있다. 금융사들의 지원책으로는 ‘레벨 39’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HSBC·바클레이 등 세계 굴지의 금융사들이 협력해 런던 핵심부 ‘원캐나다스퀘어’ 빌딩의 최고층인 39층을 벤처기업가들에게 통째로 내준 것을 말한다. 보조금 지급을 통해 임대료는 최대한 낮췄다. 핀테크의 성공을 위해서는 금융중심지에서 벤처기업과 투자자들이 머리와 몸을 맞대고 일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스페인 벤처기업 투셰의 신형 지문인식기 이미지(사진 왼쪽). 우수아이야 호텔에 설치된 투셰의 구형 지문인식기(오른쪽).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투셰 본사에서는 핀테크가 가져올 미래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2012년에 설립된 벤처기업인 투셰는 지문인식 시스템의 상용화를 이뤄낸 드문 업체다. 시스템 개발자인 하비에르 페소는 “지갑없이 술집에 갔다가 곤경에 처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왜 꼭 카드나 현금을 들고 다녀야 하지?’라는 문제의식이 생겨 시스템을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투셰의 시스템은 간단하면서도 확장성이 뛰어나다. 이용자가 손가락 2개의 지문과 함께 개인정보·계좌정보 등을 입력시켜 두면 그 다음부터는 손가락만 갖다대도 기계가 바로 인식해 자동 결제 등이 가능하다. 한번 입력해둔 지문 정보는 이 시스템을 도입하는 어떤 업소에서도 통용된다. 식당에서도 지문인식으로 주문·계산·결제가 모두 가능하고, 은행에서도 고객정보가 즉시 파악되기 때문에 신속하고 심도 있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업체 입장에서도 프로모션이나 할인 혜택 등 서비스를 자동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마케팅 작업이 한층 쉬워진다. 지문 인식만으로도 해당 고객이 혜택 대상인지 여부를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보안에 대한 우려는 암호화, 코드화로 해결했다는 게 투셰측의 설명이다. 등록된 지문은 지문 자체의 이미지가 아니라 암호코드로 변형돼 보관된다. 상클레어 CEO는 “최초 입력시에 맥박 등의 신호도 코드화해 함께 담기기 때문에 기계는 살아있는 당사자의 손가락만 인식할 수 있다”며 “범죄에 대해 우려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이 업체는 야심이 크다. 궁극적으로 인류의 미래 생활상을 바꾸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있다. 회사명을 단순한 지급결제의 의미가 강한 ‘페이터치’(Pay Touch)에서 투셰로 바꾼 것도 이 때문이다. ‘투셰’는 ‘찌르기’를 뜻하는 팬싱 용어이자 좋은 의미에서 ‘찍혔다’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프랑스어다. 상클레어 CEO는 “카드나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는 생활환경을 만들어 고객이나 서비스 제공자가 모두 ‘나 좋은 일 당했어, 찍혔어’라는 느낌을 갖게 만들겠다는 의미”라며 “‘당신의 삶을 보다 편하게 해주겠다’(Make your life easy.)는 게 우리의 기업 철학”이라고 말했다.

런던·바르셀로나=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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