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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미·일 동맹 2.0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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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오영환
오영환 기자 중앙일보 지역전문기자
오영환
논설위원

미·일 관계는 묘하다. 근현대사가 반전의 연속이다. 미국은 1854년 페리 흑선으로 일본을 개국시켰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군국주의로 치달았고 결국 미국까지 공격했다.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은 고립주의의 미국 잠을 깨웠다. 일본은 미국에 점령당했고, 민주국가로 거듭났다. 사실상 제2의 개국이다. 그 이래 미·일은 한배를 탔다. 미·일 동맹은 냉전 승리의 한 보루였고 세계 질서의 축으로 자리 잡았다. 나라의 집단기억이 있다고 한다면 서로를 어떻게 볼지 가늠하기 어렵다.

 종전 70년인 올해 미·일 관계가 다시 일대 전기를 맞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4월 26일~5월 3일)를 계기로 해서다. 세 가지가 특기할 만하다. 첫째는 아베의 상·하원 합동연설이다. 일본 총리로선 처음이다. 제2차 세계대전 추축국 독일과 이탈리아 정상은 각각 5, 6차례 합동연설을 했지만(한국 대통령은 6차례), 일본은 기회를 갖지 못했다. 미국은 냉전이 한창일 때 요시다(54년)·기시(아베의 외조부, 57년)·이케다(61년) 총리에게 상원 또는 하원에서의 환영인사 차원 연설만 하게 했을 뿐이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다음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상·하원 연설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루스벨트는 피습일을 “치욕으로 살게 될 날(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이라며 의회의 대일 선전포고를 끌어냈다. 미국이 아베에게 ‘치욕 연설’의 장을 내준 것은 미국판 역사 결산이다. 중국의 부상과 공세적 해양 진출, 일본의 안보 공헌이 부른 미·일 간 역사 화해일지 모른다.

 둘째는 미·일 동맹 2.0 시대의 개막이다. 아베의 방미 기간 양국 외교·국방 장관(2+2)은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을 마무리한다. 평시, 긴급사태 시 미·일 군사 협력이 보다 일체화된다. 미군과 자위대 협력의 지리적 제한도 없어진다. 아베 내각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허용과 적극적 안보로 가능해진 미·일 동맹의 변모다. 일본은 미국에 기지를 제공하고 비전투 지역에서 후방 지원만 하는 나라가 더 이상 아니다. 미국이 공격받으면 해외에서 전투도 할 수 있게 됐다. 미·일 동맹이 쌍무적 동맹으로 바짝 다가섰다. 일본 방위 위주의 편무(片務)적 동맹 청산은 미국의 오랜 요구사항이다. 미·일 동맹의 구조가 변했다. 화장(化粧)을 고치는 수준을 넘어 얼굴을 바꾸었다. 아베는 외조부인 기시의 ‘보다 대등한 미·일 동맹’의 꿈을 이뤘다. 기시는 미군이 일본의 내란 진압도 가능하도록 했던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했다. 일본의 전후 체제는 종언을 고하려 하고 있다.

 셋째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다. TPP는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의 경제적 축이다. 출범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일은 이번 주 초 상호 시장 접근에 대한 이견을 좁혔다. 아베는 방미 기간에 TPP 진전을 강조할 듯싶다. 미 국내 정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회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교섭 전권을 주는 법안을 심의 중이다. TPP의 장애물이 하나씩 걷혀나가는 분위기다. 중국 경계론은 여기에도 작동한다. 중국이 역내무역·투자 질서를 선점하기 전에 새 룰을 만들려 한다.

 미·일 관계 변환은 두 얼굴을 갖는다. 우리 안보에 보탬이 된다. 우리가 미국과 동맹관계인 이상 그렇다. 미·일 동맹은 일본의 폭주를 막는 병마개 역할도 할 것으로 봐야 한다. 미국의 대일 동맹은 당초 공산주의 확장과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봉쇄를 위한 것이었다. 미·일 대 중국이 전략적 경쟁을 넘어 대립 구도로 가는 것은 큰 도전이다. 안보의 근간을 훼손 않고 경제적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한다. 최선의 방책은 불신과 대립의 아시아가 평화와 번영의 회랑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역사 수정주의와의 결별 요구만큼 중국에도 국제법과 룰의 준수를 주문해야 한다. 미국엔 아시아 재균형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따지고 아시아의 균형자(Balancer)로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 한·미·일과 한·중·일 대화체는 지금 동시에 가동되고 있다. 내적으론 자강(自彊)이 필수다. 민첩하고 유연한 돌고래가 요동치는 지각판에 끼일 까닭이 없다. 무엇 하나 결정 못하는 분열의 정치, 생기 없는 경제, 활력 잃는 사회는 외부 환경 변화보다 더 문제다. 우리에 대한 최대 위협은 외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을지 모른다.

오영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