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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과주말을] 조선 백성들의 삶은 따뜻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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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이야기 책 읽어주는 노인
조수삼 지음, 박윤원.박세영 옮김, 보리, 620쪽, 2만5000원

조선 후기 '입'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있었다. 책 제목으로 쓰인 '이야기 책 읽어주는 노인'이다. 서울 동문 밖에 살던 그는 책 없이 입으로 국문 패설(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을 읽어주었다. '숙향전''심청전'같은 전기를 주로 애송했다. 문제는 노인이 가장 재미난 대목을 앞에 놓고 입을 다문다는 것. 궁금증을 참지 못한 사람들은 노인에게 다투어 돈을 던져주었다.

"애들과 부녀들은 안타까워 눈물까지 떨군다네/영웅의 성패가 어찌될 건가 손에 땀을 쥐면서./재미나는 대목에서 말을 뚝 그치니/돈 받는 법 묘하구나/누군들 뒷말이 듣고 싶지 않으랴."

TV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노인은 이른바 지금의 토탈 엔터테이너가 아니었을까. 그의 속이 훤히 보이는 '상술'이 오히려 정겹게 다가온다. 요즘 같은 시절엔 상상도 못할 미담도 있다.

홍씨가 가세가 기운 이씨의 집을 사들였다. 그런데 수리 도중 돈 3000냥이 나왔다. 뜻밖의 횡재다. 그런데 웬걸? 홍씨는 이씨 집에서 나왔으니 돈을 돌려주려 하고, 이씨는 어차피 집을 넘긴 상황이니 새로 나온 돈도 홍씨 것이라고 사양한다.

조선 후기 여항(閭巷) 시인 조수삼(1762~1849)의 시와 글을 묶은 책이다. 여항은 백성들이 사는 거리나 골목을 뜻하는 말. 시는 물론 그림.의학.바둑.거문고 등에 두루 재능이 뛰어났던 조수삼이 19세기 조선 민초들의 삶을 진솔하게 들려준다. 굳이 비유하며 조선시대판 '만인보'쯤 될까. 부패한 왕조, 피폐한 경제 속에서 고단하게 살아갔던 백성들을 따뜻하게 보듬고 있다. 시편으로 돌아보는 19세기 조선 민중 생활사로 봐도 큰 무리가 없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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