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제80화>한일회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민주당정권의 친일 선회
민주당 정부는 「대일화친내각」이라는 세평을 받았을 만큼 대일 자세에 적극적이어서 이대통령의 철저한 반일 정책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장현 국무총리가 조각을 끝낸 다음날에 정일형 외무장관이 한일 수뇌회담을 제의하고 「고사까」(소판선태낭) 일본 외상을 초청한 것만 봐도 짐작이 갈 것이다.
「고사까」외상 방한직전에 나온 한 신문의 논평을 보면 상황의 급변이 선명히 부각된다.
『제2공화국 수립과 더불어 보면 내각이 성립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사슬에 매였던 호랑이가 항상 도망갈 궁리만 하다 갑자기 사슬이 풀려 얼떨결에 뛰어 넘어지는 것 같은 광경같이 너무 갑자기 대일수교의 방향으로 달려간 감이 없지 않은 것이다』
일본이 11윌12일로 만료되는 북송협정을 1년간 연장할 움직임을 보이면 시기임을 감안해보면 더욱 그렇다.
대일 통상도 전면 재개되고 오히려 정부의 대일 구매 방침이 능동적으로 추진되기까지 했다.
9윌6일 서울에서 가진 양국외상의 회견을 봐도 그렇다.
정 장관은 한·일·미·자유중국·비 5개국이 참가하는 동북아 동맹을 구상하고 있다면서『우리는 일본이 이 동맹에 참여하는데 있어「국내적인」곤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일본은 공산위험에 대처하려는 이 기구에 인식을 새로이 해야할 것』이라고 애원하는 투로 일본의 참여를 호소했다.
동북아 동맹구상의 연원은 원래 「딜레스」미 국무장관이 50년대 중반에 제기한 태평양 동맹에서 비롯되었으나 이 대통령의 일본 배제라는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무산됐던 것이다.
그후 이 대통령은 60년대초 나를 동남아지역 흑사로 보낼 때 공산위협과 일본의 경제적 신진민주의 대두에 아울러 대항키 위해 이러한 구상을 했었다.
정권의 교체가 국가의 외교시책을 정반대로 전환시킨 좋은 예다.
이에 비해 「고사까」외상은 『한고북송은 적십자간의 일이므로 일본 정부로서는 개입할 수 없다』고 후안무치하게 말하고 『정치는 앞을 보고 해야하므로 과거의 사실에 구애되지 말고 장래문제를 논 할 것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적지에 들어와서 한 말이었다.
장래문제의 논의를 희망한 「고사까」외상은 한일간의 최대 장애인 북송문제를 적십자사간의 일로 간단히 미뤄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일본각의에서 결정되어 강행된 한화추방정책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는데도 민주당 정부는 일본정부의 혁지 번영을 양해하는 선에서 한일 현안타결에 주력했다는 평을 들을 수 밖에 없다.
「고사까」외싱은 7일 낮 하네다 공항에 내려 『정부 대표로서 l5년만에 한국을 방문해 한국정부의 비상한 환영을 받고 아울러 함께 일한 양국의 우호친선의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긴다』고 말했다.
「고사까」외상 방한 후 양국의 교진은 10월25일 정식 회담에 앞선 예비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정부는 회담이 열리기 전 분위기 조성을 위해 금산에 억류중이던 미결수를 포함한 일본인어부 40여명을 전원 석방했으며 윤회선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이재항 주일 공사후임에 목사 출신의 엄호섭씨를 임명했다.
한일 회담 수석 대표에 초기 한일회담에 참여했던 유진고대 총장을 임명해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중이던 유 박사를 급히 귀국시켜 대일 전략을 협의했다.
암공사·유창순 한은부총재(교체 수석)·변호사 김윤근씨·외무부의 진필식 통상국장·문철정 주일대표부 참사관 등이 대표로 임명되었다.
민주당 정부는 회담에 입하기전 대표단을 총리공관에 모아 세미나 형식으로 토론을 가졌는데 대표단을 한일양쪽으로 편을 갈라 모의공방전까지 벌이는 비상한 열의를 보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