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자식보다 더 아껴준 『기른 정』우리 부모님을 돌려주세요|최은희·신상옥씨 양녀 신명희씨의 애타는 호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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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부모의 품안에서 자라난 이세상의 모든 아들딸들에게 호소합니다. 아들딸을 키우는 이세상의 모든 부모님들께 이 글을 올립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돌려주세요.
망연자실한 지금의 심정대로 울어서 될 수 있다면 가슴을 찢으며 하늘에 대고 울겠습니다. 신발을 벗어들어 땅이 꺼지도록 통곡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그시 눈을 감고 저를, 그리고 부모님을 돌아봅니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불과 며칠 앞둔 어느 날 『너의 졸업식 하루 전날에는 돌아오마』며 떠나신 어머니가, 그 뒤『어머니를 꼭 찾아오마』고 가신 아버지가 결국 살아있으나 죽느니 만도 못한 자리에 서셨다니요.
그로부터 6년여.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여자로 성장하면서 저는 많은 것을 깨우쳤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의 한, 아마도 그 한을 스스로 넉넉히 삭일 수 있는 품성의 여자였기 때문에 고아원에 버려진 남매를 데려다 친자식처럼 애지중지 길렀던「기른 모정」.
고교 2년 때의 어느 가을날, 어느 여성지에 쓴 기사를 통해 우리 집안의 엄청난 비밀을 알고 천지가 맞닿는 충격을 받기까지 부모님은 제가『주워온 아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않게 길러왔어요. 『명희야 ,네가 웃을 때 보면 꼭 아빠 얼굴이 생각나』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이 말씀이 저의 어린 시절을 구원해 주었던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 굳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훗날 모든 진실을 알고도 몸을 지탱할수 있었던 거예요.
그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고 누구의 어머니입니까? 엄마 아빠가 실종 된 후 우리 남매는 아무도 돌봐 주지않는 진짜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동생 정균이는『너희들은 신씨집안 사람이 아니다.』라는 한 친척의 말을 뒤로하고『어머니의 일생을 내 손으로 영화화하겠다』며 영화판에 뛰어들어 만나기조차 어렵게 되었고, 저는 저대로 어머니가 이사장으로 계시던 안양예고 출신으로 연극을 하며 지금의 남편을 만나 충북 괴산의 시집에서 담배 농사를 돕고 있어요.
서울에서 버스로 2시간, 이어 비 포장길을 달려 1시간, 다시 논두렁 밭 두렁 길을 따라 1시간 걸어 들어가는 오지가 시집 동네입니다. 남편은 장남으로 4남4녀가 7천여평의 밭되기에 담배 농사만을 지으며 살아요. 그리고 저는 딸 둘을 낳았고 아기아빠는 일찌기 뜻을 두었던 영화 관계의 일을 얻기 위해 서울에서 백방으로 뛰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실종된 이후 낳은 부모도, 길러준 부모도 행방을 모른 채 살다가 첫딸 운덕(3) 이를 낳았을 때 『이 아이가 나의 살붙이구나』고생각하니 눈물이 펑펑 쏟아지대요. 저는 이제 눈물을 거두고 두 아이를 끌어안고 다짐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아이들을 내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하늘이 맺어준 피붙이를 강제로 떼어놓는 것보다 더한 죄악은 없다고 말입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사람의 양심에 간곡히 청하오니, 자식들이 아무 때라도 만나뵐수 있는 곳에 어머니 아버지가 있게 해주세요.<신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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