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구 200만 개, 전깃줄 132㎞로 꿈과 환상의 성탄절 만들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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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자신이 만든 크리스마스 장식 앞에서 포즈를 취한 황주미씨. 김성룡 기자

그녀는 꿈과 환상 속에서 연말을 보낸다. 9년째다. 마음이 얼어 붙고 꿈을 잃어가는 시기일수록 화려함과 멋이 필요하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추운 겨울, 몸을 웅크리며 지나가는 행인의 마음에 따뜻함을 심어주고 싶다고 했다.

롯데백화점 디자인실 황주미(32) 계장. 연말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일대의 야경을 크리스마스 장식 등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그녀의 임무다.

화려한 장식을 선보이기 위한 준비는 여름부터 시작된다. 장식의 기본 개념을 설정하고 10월 말 시안이 확정되면 한 달 여에 걸친 공사에 들어간다. 백화점 영업이 끝나고 다음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밤샘 작업을 통해 공사가 진행된다. 본사 직원 10여명과 협력업체 직원 등 100여명이 투입된다.

이에 드는 비용은 6억여원, 사용되는 전구 수는 크고 작은 것을 합쳐 200만개, 전선의 길이는 132㎞에 이른다. 올해는 녹색과 황금색 보라색을 기본으로, 화려하고 고풍스럽게 꾸며 지난달 중순 불을 밝혔다.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은데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녀는 "살기 힘들수록 마음이 차가워지지 않느냐"며 "시민들에게 꿈과 환상과 따뜻함을 안겨 주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엄마 손을 붙잡고 와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며 환호하는 꼬마들과 화려한 불빛 아래서 사랑스런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을 볼 때면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자식처럼 다룬다. 만드는 데 온갖 정성이 들어가고 철거하는 순간까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지난해 자신이 꾸민 노원점 트리 장식에 불이 났다는 연락을 받고 새벽에 뛰어 나갔다가 흉해진 모습에 한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비나 눈이 오면 감전을 걱정하고 바람이 불면 장식물이 떨어질까 노심초사다. 밤낮이 뒤바뀐 한 달여의 야간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달 이상을 그렇게 생활하다 보면 작업을 마친 뒤에도 한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특히 기차역사와 함께 있는 영등포점과 청량리점에서의 야간 작업은 무척 조심스럽다고 한다. 역사에서 고달픈 하루를 마감하는 수많은 노숙자의 잠을 방해할까 걱정돼서다. 하지만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공사를 마치고 시험 삼아 불을 켤 때 가장 먼저 보는 사람들이 바로 노숙자와 청소원, 새벽 근무 중인 경찰관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힘들게 새벽을 넘기는 사람들이 마법의 나라에 온 듯한 환한 표정으로 장식을 바라볼 땐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말했다. 9년 동안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꾸미면서 주위에 어려운 사람이 많음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했다.

대학에서 공예를 전공한 황 계장은 대학 시절 잠실 롯데월드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것이 계기가 돼 1997년 입사한 직후부터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염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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