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7)제80화 한일회담(15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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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본언론들은 5월하순 제네바의 일적대표단 소환문제를 일본정부가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태하주일대사에게 좀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던「사와다」수석대표의 간청이 우리측을 기만하기위한 술책이 아니었음은 분명해졌다.
그러나 일본내에서 「사와다」류의 북송계획회의파들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사와다」 대표의 동조세력으로는 「사까다」 후생상,「야마다」 외무차관, 「후나다」자민당외교조사위원장, 그리고 「기시」수상등 그야말로 한줌에 불과했다고나 할까. 「기시」수상이 비록 북송계획에 찬성하는 진의를 갖고있지 않았지만 그는 한국인을 일본땅에서 내몰아야 한다는 여론과 「후지야마」 외상등 강경파의 높은 소리에 수상으로서의 결단을 행사하지 못했다.
조총련의 북송사업에 직접 관여한 「사또·가쓰미」(좌등승기)라는 사람이 쓴 『나의 체험적 한국문제』라는 책을 보면 당시 일본이 거의 거국적으로 북송을 추진했던 분위기가 잘 나타난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자민당에서는 가장 친한적이라는 「기시」씨가 총리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한일회담을 중단하면서까지 무엇때문에 재일한국인의 북송을 허용했느냐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재일한국인의 북한행이 「인도주의와 인권」에 부합된다고 생각해서 지지한 일본인들이 있었던것은 확실하지만 그와 동시에 재일한국인이 일본에서 없어지기를 바라는 일본인들이 더 많았던것은 사실이다.
첫 북송선이 니이까따(신석)항을 떠난 59년12월14일 직전「재일한국인귀국협력회」간사장이며 일본사회당소속 중의원 「호아시·게이」(범족계)씨같은 사람은 한집회에서 재일한국인이 귀국하면 그들에게 지급하는 생활보조비가 줄어들기 때문에 일본의 국가이익에 합치된다고 공언하고 있었다.
또 니이까따현귀국협력회는 첫북송선이 출발한후 시민들을 상대로 재일한국인귀국에 협력하기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1963년께부터 북송자의 수가 격감되자 일부 협력회간부들로부터「한국인들을 하루속히 일본에서 떠나게 하기위해 모금에 협력했는데 어째서 그들은 아직도 나가지않고 있느냐」는 항의가 공공연히 나오게 됐다』
「사또」씨가 당시의 일본국내사정을 나중에 정리한 이같은 증언을 보면 일본여론은 한국인강제추방을 계획한 「후지야마」외상에 전폭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음이 확연해진다. 「후지야마」외상은 이같은 여론을 등에 업고 한국인강제추방을 실현시키는데 갖은 지모를 동원했고 북적에 굴복하면서까지 밀고나갔던 것이다.
6월초 제네바의 제14차회담때 일적은 북적의 완강한 자기노선 고집때문에 결렬도 불사하겠다고 표명했으나 결국 일적은 북적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것이다.
6월10일 열린 제17차회담에서 일적은 북송희망자의 자유의사여부를 확인하는 기구의 설치를 철회해 북적측 요구를 만족시켰다.
일본측이 당초 내세웠던 국적의 참여방안, 즉 동경과 니이까따에 국적의 감독관을 파견해 제3자에 의한 객관적 자유의사 여부를 확인케 하려던 최후의 안전장치가 물거품이 된것이다.
이에따라 북송에 관한 양적간의 최대장애가 사라졌고 그 이외에는 그야말로 절차상의 문제만 남아 사실상 타결된것이나 다름없게 됐던 것이다.
북적도 국적대표를 고문으로 참가하라는 일본측 제안을 받아들였다. 양적대표는 이날 공동성명을 발표, 두달간에 걸친 교섭이 완전합의에 이르렀으며 15일부터 최종적인 협정문의 기초에 착수할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11일 북송저지를 위한 필요한 모든 조처를 행동으로 취하겠다는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으나 패색은 짙어져만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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