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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목요일] "주스 한 병도 안 돼요" 딱 잘라주니 "촌지 문제, 안 헷갈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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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초등학교 3학년 자녀를 둔 주부 이모(38·서울 강남구)씨는 이번 주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앞두고 골치가 아프다. 선물을 할지 말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다. 이씨는 “같은 반 엄마끼리 모여도 뭘 가져갈 것인지 얘기하지 않아 나만 안 하게 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선 불법 찬조금과 촌지 수수는 안 된다고 가정통신문을 보내지만 담임의 성향에 따라 받는 경우도 있어 혼란스럽다”고 덧붙였다.

 지난달부터 4월까지 이어지는 학부모 상담 주간을 맞아 학부모들은 여전히 촌지가 고민스럽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달 1만~2만원 상당의 선물·모바일상품권만 받아도 경징계하겠다고 밝히면서 학교의 분위기가 다소 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들을 갈등하게 하는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딸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된 김모(40·서울 강남구)씨는 “강남지역 학교에선 1년에 두 번 하려면 얼마, 한 번 하려면 얼마 식으로 금액이 나돈다. 솔직히 촌지 건넨 얘긴 남편에게도 안 하는 게 불문율인데 누가 아느냐”고 씁쓸해했다. 직장맘인 진모(39·서울 성동구)씨는 “알림장에 아무것도 들고 오지 말라고 써주는 선생님들이 있다던데 너무 부럽다. 촌지 받는 선생님인지 아닌지 정보가 없는데 모르는 게 약인가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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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부모가 겪고 있는 애매모호하면서도 고민스러운 상황은 교사가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면 쉽게 풀린다. 양천구 초등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박모(41)씨는 “학부모 총회 때 담임이 ‘선물 받은 걸 다른 학부모가 신고하면 제가 곤란해지니 학년 마칠 때 아이들이 스스로 마련한 머리핀 등 5000원 미만의 감사 표시 정도만 받겠다’고 하시더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이 섰다”고 강조했다.

 학부모의 촌지 고민이 없는 학교에선 교장이 공통적으로 촌지 문제에 단호하게 대처한다. 교장이 촌지는 안 된다고 강력히 강조하면 학부모나 교사가 조심한다는 것이다. 서울 송파구 마천초 손웅 교장은 학교 행정실에 ‘선물코너’를 만들어놓고 떡·음료수 등 학부모가 굳이 주고 간 물품을 교사들이 신고하도록 했다. 손 교장은 “이런 물품을 모아 학교 이름으로 인근 복지시설에 기부한다. 지난해 스승의 날엔 화장품과 커피세트도 포함됐었다”고 소개했다.

 다양한 아이디어로 촌지와 싸우는 학교도 있다. 서울 서초구 신동초는 자주, 구체적으로, 강하게 ‘촌지 금물’ 메시지를 전한다. 연 10차례 이상 교사 대상 청렴 연수를 여는데 시교육청이 권고하는 연 1회 2시간보다 훨씬 많다. 이 학교 관계자는 “그냥 촌지는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니라 학부모 총회 등에서 ‘커피 한 잔, 빵 한 조각, 주스 한 병도 안 됩니다. 가져오려면 반 학생들 모두의 것을 사오세요’라고 설명한다”고 말했다. 이 학교 학부모 황모(46)씨는 “작은 먹거리도 안 된다고 알려주니 헷갈리지 않아도 됐다”고 했다. 학부모들이 교문에 들어서면 학교보안관이 핸드백 외 물건은 교실로 가져가지 말고 맡기라고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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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노원구 연지초 이은주 교장은 “입학식·졸업식 등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학부모가 화환·화분을 사오던 관행을 없앴다. 학교 예산으로 큰 화분을 장만해 행사 때마다 리본만 바꿔 단다”고 소개했다. 학부모 총회 등에 쓰이는 음료와 간식거리도 학교가 예산으로 미리 마련해 학부모들이 음료수 한 병도 가져올 필요가 없게 했다. 그는 “교사가 ‘빵은 괜찮겠지’ 하고 받으면 다른 학부모도 가져오고 점점 큰 것으로 이어진다. 학교가 변하니 학부모들이 마음 편하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교사들도 학부모에게 바라는 게 많다. 송파구 초등학교 교사 이모(54)씨는 “하지 말라고 해도 반장·부반장 엄마 등이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데 부모들도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 촌지를 받고 안 받고는 교사 개인에게 달린 문제인데, 일부 선배 교사들이 초임 교사들에게 은근슬쩍 받아도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경우가 있다. 교대 시절부터 윤리과목을 강화해 자세를 기르고 오게 하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양천구 초등학교 교사 성모(43)씨는 “지금은 학급당 학생 수도 적어 촌지를 준다고 학생을 다르게 대하지도 않는다. 커피라도 한 잔 받으면 학부모들 사이에 소문이 확대 재생산돼 난감하다. 부도덕한 교사는 확실히 처벌받도록 하고 학부모들도 만약 촌지를 안 줘서 아이가 불이익을 받는다 싶으면 정식으로 학교에 의견을 내야 한다. 그래야 안 받는 교사에게 좋고 나쁜 마음 먹은 교사를 거를 수 있다”고 말했다.

 내 아이만 위하려는 학부모의 이기적인 처신도 이번 기회에 바로잡혀야 한다. 초등학교 4학년 자녀를 둔 전모(40·서울 서초구)씨는 “촌지를 줘도 교실에서 떠드는 아이보다 안 주더라도 행동이 바르고 수업시간에 성실한 아이를 교사는 더 좋아할 것”이라며 “엄마들 사이에 떠도는 촌지 얘기도 부풀려진 게 많으니 무조건 믿지 말라”고 조언했다. 또 다른 학부모는 “안 받는 교사와 안 주는 학부모가 훨씬 많으니 교사와 자녀의 관계만 잘 살피면 된다”고 말했다.

김성탁·김기환·신진 기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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