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가서 자습만 한다, 달라진 재수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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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 재수생이 늘고 있다. 흔히 재수생이라 하면 재수종합학원에 등록해 공부하거나 기숙학원을 찾는 학생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최근 쉬운 수능이 몇 년째 이어지면서 혼자 힘으로 재수를 해보겠다는 학생이 많아졌다. 이들을 잡기 위해 학원도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서울 강남·목동과 경기 평촌 등 학원 밀집가엔 독학 재수관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인터넷강의 사이트에선 독학 재수생 전용 서비스를 내놓았다. 독학 재수생을 타켓으로 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된 거다. 달라진 재수 풍경을 들여다봤다.

정현진 기자 Jeong.hyeonjin@joongang.co.kr 

지난 24일 오전 10시 강남의 유명 재수종합학원인 J학원의 6·7층 교실에선 90여 명의 재수생들이 자율학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학원이 올해 초 개원한 독학재수반이다. 학생들의 책상엔 인터넷강의 시청을 위한 개인PC가 한 대씩 놓여있었다. 일부 학생들은 이어폰을 끼고 인강을 시청하고 있었고, 어떤 학생은 문제집을 푸느라 여념이 없다. 재수정규반 학생들이 한창 수업을 들을 오전 시간에 독학재수반 학생들은 자기가 짠 공부 계획에 따라 집중하고 싶은 과목만 골라 인강을 듣거나, 자습을 하는 등 혼자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50명 모집 독학재수반에 120명 몰려

학원은 편하게 인강을 시청할 수 있는 시설과 자습공간을 제공하고, 필요할 때마다 학습상담과 진학 컨설팅을 제공한다. 학생들의 등원·퇴원을 점검하고 자율학습 감독 등 생활관리도 해준다. 이 학원의 독학재수반에 다니고 있는 이성규(19)군은 “쉬운 수능이 이어지면서 공부는 혼자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며 “하지만 재수 기간 동안 생활이 흐트러질 수 있으니 생활관리는 학원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효과적이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이 학원 관계자는 “원래 올해 초 50명 규모로만 시범적으로 모집해보려던 것이었는데 반응이 좋았다”며 “90명 규모로 증설했고 지금도 대기자가 30명이 넘어 120명까지 시설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독학의 공부 방식과 재수반의 생활관리가 결합된 신(新) 재수 풍토다.

독학 재수생의 증가는 학원가의 풍경을 바꿔놓고 있다. 남윤곤 메가스터디 소장은 “최근 재수종합학원뿐 아니라 재학생 중심 학원도 독학 재수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며 “몇몇 학원은 학교 수업 때문에 낮에 비는 재학생용 교실을 독학 재수생들에게 자습 공간으로 제공하고 일정관리를 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 인터넷강의 사이트는 올해 ‘독학 재수생 전용 서비스’를 따로 개설하고 오전 9시~오후 5시 제공되는 인강을 절반 가격에 들을 수 있게 했다.

"물수능, 혼자 해볼 수 있단 생각 들어"
학원은 빈 교실 제공하고 감독, 출석 관리
대학 가서 재도전하는 반수생 증가한 것도 원인

입시전문가들은 독학 재수생의 증가 이유를 ‘입시 환경의 변화’로 진단한다. 우선 쉬운 수능 영향이 컸다. 오종운 종로학원하늘교육 평가이사는 “최근 몇 년 동안 수능이 쉽게 출제되다보니 고난이도 문제 대응보다는 실수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 됐다”며 “중상위권 학생 중엔 학원 수업보다는 문제를 많이 풀어보면서 실수를 줄이는 훈련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수험생이 많아졌다”고 분석했다.

재수생이 학원에 바라는 서비스의 종류도 달라졌다. 국어·영어·수학·탐구까지 4과목 모두를 학원이 짜둔 일정에 맞춰 소화해야 하는 기존 재수종합학원의 수업 방식에 변화를 요구하는 이들이 늘었다. 현재 재수 중인 김모양은 “재수종합반은 수업 시간을 촘촘하게 잡아준다는 게 장점이지만 내가 원하는 수업을 골라 들을 수 없다는 건 단점”이라며 “인강으로 원하는 수업을 골라 듣고 자율학습 시간을 더 충분히 갖는 걸 원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부족한 과목엔 시간을 더 투자하고, 안정적인 과목은 현상 유지를 하는 식으로 전략적인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수험생이 많다는 것이다.

“반수생 탓에 수능 난이도 조절 실패”

반수생의 증가도 이런 경향에 한몫했다. 반수생은 이미 대학에 합격한 학생이 2학기를 휴학하고 다시 대학입시에 도전하는 학생을 말한다. 김병진 이투스교육 진학실장은 “지난해 의학전문대학이 대부분 의과대학으로 전환하면서 의예과 선발인원이 대폭 증가했다”며 “이미 대학에 합격했던 자연계 학생 중 상당수가 의예과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반수를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고 분석했다. 그는 “반수생은 이미 대학에 합격했던 학생들인 만큼 실력을 갖춘 상위권 학생들이 많다”며 “반수생의 증가가 독학 재수생의 증가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수생의 증가는 ‘물수능’이라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실제 지난해 수능에선 의예과를 노린 자연계 최상위권 반수생 학생들이 늘면서 자연계 학생이 응시하는 수학B형의 만점자가 4.3%에 달하기도 했다. 한 문제만 틀려도 2등급으로 주저 앉았다. 교육부 한 관계자는 “수능 난이도는 6·9월 모의평가를 거치면서 조절해가는데, 최상위권 반수생이 모의평가엔 참여하지 않다가 갑자기 수능에 대거 응시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수능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올해도 이런 경향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오종운 이사는 “일반적으로 입시제도의 변화가 없을 때는 반수생이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며 “올해는 지난해와 대학입시가 거의 똑같기 때문에 반수생이 더 증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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