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대통령의 위기감 고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실패한 대통령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임기 첫해에 내뱉은 말이다.

20, 30대의 경험 없는 백악관 보좌진의 실수는 연일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고, 급기야 철없는 보좌진이 백악관의 수건과 가운까지 훔쳐간다는 언론의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동성연애자에 대한 군입대 허용정책은 보수층의 분노를, 거창하게 출발한 의료보험 개혁작업은 정책적 성과 없이 지지층의 분열만 초래하자 나온 말이다.

*** 클린턴 정부도 초기 잦은 실수

그러나 그 자신의 자조적인 예언과 달리 클린턴 대통령은 실패하지 않았다. 르윈스키 사건이라는 오점을 남기기는 하였지만, 미국의 고질병인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였고, 미국 역사상 최장기 호황을 이끄는 대통령이 되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도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위기감을 느낀다고 고백하였다. 무책임한 말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지만, 적어도 대통령이 국정난맥상을 인식하지 못한 채 권력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안도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대통령이 사면초가에 빠지게 된 현 상황의 가장 큰 원인은 대통령 자신과 그 보좌진의 대통령직에 대한 인식부족, 그리고 국정현안의 우선순위 설정과 현안별 전략수립 실패, 그리고 국민의 힘을 정책 추동력으로 이용하지 못한 데 있다.

대통령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그것이 정책에 반영되도록 설득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든 의견을 종합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다.

그리고 결정된 정책이 대통령의 의견으로 국민에게 전달되어야 하는데, 조정되지 않은 대통령 개인의 생각이 국민에게 너무 많이 전달되고 있는 데에서 대통령의 권위가 손상되고 정책적 혼동이 생기는 것이다.

현재의 비서실이나 국무회의의 운영은 케네디 방식, 즉 참모의 수장 없이 대통령이 중심이 되어 참모들과 직접 연결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2인자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대통령의 감정에 따라 정책이 춤을 추고, 또 대통령에게 업무의 과부하가 걸리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케네디 대통령이 그 점을 우려하여 그러했듯이 대통령 없이 회의를 하도록 책임을 위임하는 방식을 적절하게 배합하여야 한다.

여론이 날카롭게 양분되어 있는 대북.대미 문제는 가능한 한 이슈화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따라서 정부는 '북한 핵의 평화적 해결' '한.미공조의 강화'와 같은 원칙을 제시하며 좋은 경찰(good cop) 역할을 하고, 미국이나 북한의 정책을 견제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이를 언론에 흘려 각각 진보 여론과 보수 여론으로 하여금 나쁜 경찰(bad cop) 역할을 하도록 하는, 즉 언론과 국민의 힘을 적절히 이용하는 여유와 지혜가 필요하다.

모든 국민이 한결같이 원하고 있는 정치개혁에는 보다 당당하게 나설 필요가 있다. 물론 국민은 대통령이 신당 창당을 주도하거나 17대 총선 승리를 위한 제도 조작에 집착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이익대표와 조정체계를 만들기 위해 정치관계법을 손질하고 낡은 관행을 고쳐 나가는 것은 한시가 급하다.

*** 언론.국민의 힘 적절히 이용을

화물연대 운송거부 사태의 해결과정만 보아도 우리 정치의 낡은 단면을 명확히 볼 수 있다.

국회의 승인 없이는 국가 예산을 쓸 수 없는 것이 헌법의 기본정신임에도 불구하고 1천8백억원의 예산이 필요한 경유세 인상분에 대한 보조금을 제공하기로 합의하는 행정부나, 그것을 요구하는 쪽이나, 그리고 자신들이 나서야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행정부의 처리에 대해 사후 추궁이나 하는 의원들이나 낡은 정치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가 잘 되면 대통령의 파격적인 언행이 서민적이고 탈권위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경제가 나쁘면 오히려 대통령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국민의 눈에 비친다는 점을 감안해 경제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민전 경희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