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세기의 천재' 아인슈타인이 설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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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2월 아인슈타인은 50세 생일을 맞았다. 그가 머물던 베를린시의 집에는 축하 전보와 하객들이 밀어닥쳤다. 베를린시는 아인슈타인에게 하벨강가에 별장 터를 기증하겠다고 할 정도로 극진한 생일 대접을 했다. 18일은 그가 타계한 지 50주년이다. 생전의 50세 생일에는 베를린시 차원의 생일 축하가 있었지만 타계 50주년에는 세계적으로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펼쳐지고 있다. 올해가 '세계 물리의 해'로 지정된 것도 아인슈타인 서거 50주년, 상대성 이론 발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과학적인 업적 뒷면에는 보통 사람보다 냉혹한 면모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공과대학의 동급생이었던 네 살 연상의 밀레바 마리치와 1903년 부모의 반대에도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하기 2년 전 밀월여행으로 딸 리제를을 낳았다. 그러나 딸은 두 살 때 병사했으며, 이들 부부는 죽을 때까지 리제를의 존재를 함구했다. 이는 1986년 아인슈타인의 아들 한스 앨버트가 마리치와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주고받은 54통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밝혀졌다.

아인슈타인이 마리치와의 결혼생활이 파경에 이를 때쯤 보낸 편지에는 가부장적이고 차가운 일면이 드러나 있다. 아인슈타인은 결혼 11년 만인 1914년 마리치에게 이혼하고 싶다며 몇 가지 조건을 지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중 '집에서 당신 옆에 앉으라고 하지 말 것이며 같이 외출하는 것은 꿈도 꾸지 말 것''내가 부르면 즉시 대답하고 어떤 애정도 기대하지 말며, 방에서 나가라고 할 때 즉시 나가줄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두 사람은 5년 뒤 정식으로 이혼했다. 이혼할 때 아인슈타인은 마리치에게 노벨상을 탈 것을 자신한 듯 그 상금을 위자료로 주기로 했다. 아인슈타인은 2년 뒤인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탔다.

한국과학문화재단 조숙경 박사는 "그때 상금은 12만 크로노(스웨덴 화폐단위)로 아인슈타인은 이 상금의 절반을 마리치에게 줬다"며 "이는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 총 상금이 130만 달러(약 13억원)로 1000만 크로노에 해당하는 것을 감안하면 액수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노벨상 업적은 광전효과의 법칙을 밝힌 것이었다. 그의 대표적 연구 성과인 상대성 이론이 아니었다.

세기의 천재 과학자였던 아인슈타인도 학과 동기생의 수학 노트를 빌려 시험공부를 했다. 자신은 수학시간이 싫어 수시로 결석했기 때문이다. 수학 노트를 빌려줬던 마르셀 그로스만은 아인슈타인에게 졸업 뒤 스위스 특허청에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특허청에 근무하는 기간에 아인슈타인의 대표적 연구 성과인 광전효과, 상대성 이론 등 주요 연구 성과가 완성됐다. 아인슈타인은 평생 그로스만의 은혜를 잊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언어 발달은 아주 느렸다. 그가 1954년 쓴 편지에는 세 살이 넘도록 말을 하지 못해 아버지가 병원에 데려가기도 했다고 썼다. 과학사 전문가들은 아인슈타인이 10살이 되어서도 독일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의 연장이었는지 고교시절에도 그리스어를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다. 공부도 독학을 많이 했다. 그가 주입식으로 공부하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했다는 사실이 자서전에 자주 등장한다. 프로 수준에 필적하는 바이올린 실력도 거의 독학으로 익힌 것이었다.

대학이나 연구소가 아닌 특허청 직원으로 근무한 7년(23~30세) 동안 세기의 연구 업적을 낸 것도 이런 성격과 공부 방식이 가져온 결과다. 아인슈타인은 "자발적인 흥미는 의무감보다 훨씬 좋은 교사라고 믿는다"라고 자서전에 썼다.

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않았다. 베른대학 강사 시절 아인슈타인은 덥수룩한 머리와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대학 수위들조차 우습게 볼 정도였다고 그의 동생 마야는 회고했었다.

박방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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