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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 불신받는 일본, 미국도 탐탁지 않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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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사진=지지통신 제공]

"아시아로부터 불신받는 일본에 대해선 미국도 매력을 못 느낄 것이다. 아시아 주변국의 신뢰를 얻는 것이 일본의 대미 외교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1998년 당시 일본 외상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의 '한.일 공동선언'을 이끌어 냈던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63) 의원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대미 추종 외교에 쓴소리를 했다. 일 정계 인사 중 외교분야에서 가장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는 고무라 전 외상을 24일 도쿄 고지마치(麴町)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고이즈미 총리가 최근 미.일 정상회담에서 미국에 편향된 외교정책 노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어떻게 봐야 하나.

"원래 일본 외교는 일.미 관계가 기축이다. 정상회담에서 미국과의 밀월관계를 과시한 것은 그 자체로는 나쁠 게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일.미 관계만 좋으면 자동적으로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도 좋아질 것이라고 오해받을 만한 얘기를 한 것은 문제다. 진의는 다를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아시아를 가볍게 보고 있다는 불신감을 주변국에 심어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미 편중" 오해 풀어야

-고이즈미 총리가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주변국들은 아시아 경시 외교로 받아들일 만한 외교적 언사를 계속하는 배경을 무엇이라고 보나.

"고이즈미 총리가 아시아를 경시하고 있다고 보진 않는다. 특별한 배경이 있어 일.미 간 밀월관계를 과시한 것도 아니라고 본다. 다만 국민이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시키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원래 그런 사람 아니냐."

-일본의 외교 자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중.일 관계 악화가 이어질 경우 동아시아의 역학 구도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

"고이즈미 총리의 생각은 '오해가 있다면 오해하는 쪽(한국.중국을 지칭)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개인의 생각으로 그친다면 모르겠지만 오해 때문에 나라 전체가 그 결과를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차원에서 볼 때 오해받지 않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 일.미 관계와 더불어 아시아 외교에서도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성의를 갖고 노력해야 한다."

-미.일 유착은 중국의 군사.경제 대국화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란 분석이 있다. 한국은 중국과 점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장차 동아시아에서 '미.일 대 한.중'의 대립 구도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가.

"남북한을 사이에 두고 중국.러시아와 미국이 맞서는 대립구도의 색채가 엷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미.일 대 한.중의 대결구도가 이를 대체할 것으로 보진 않는다. 어떤 국면에서는 그런 구도가 나타날지 모르지만 일방적으로 그렇게 가진 않을 것이다."

-일본의 미국 편중 외교를 미국도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입장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는데.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다만 미국하고만 사이가 좋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주변 국가들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

-한국에선 아소 다로(生太郞) 외상,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 등 강경파 인사들이 외교 전면에 포진한 데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일개 국회의원 때 말하는 것과 관방장관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100% 같지는 않을 것이다. 아소 외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아베 관방장관이고, 아소 외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일본의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부분을 더 잘 설득할 수 있는 점도 있다고 본다."

-한.일 간 갈등을 원만히 해소하기 위해선 두 나라가 무엇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한다고 보나.

일 정치인 언행 신중하길

"98년 김대중.오부치 정상회담에서 김 대통령은 문서로 확실히 사과하면 한국은 두 번 다시 과거 문제를 외교 이슈로 삼지 않겠으니 20세기의 일은 20세기 안에 끝내자고 했다. 이에 따라 오부치 총리도 공동선언문에 '사죄'란 표현을 넣은 것이다. 그것은 대다수 일본인의 마음이기도 했다. 공동선언문에 들어간 사죄의 표현에 대해 한국 국민이 의문을 갖게 할 만한 언행을 일본 정치인이 해서는 안 된다. 한국도 보다 냉철하게 양국 관계를 원만히 풀어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관건은 역시 야스쿠니 신사 참배다.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에 그렇게 매달리는 이유가 도대체 뭐라고 보나.

"고이즈미 총리가 전쟁을 미화하기 위해 야스쿠니에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과거의 전쟁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중의 국민감정 중에는 오해에 따른 부분도 있다. 이 오해를 푸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야스쿠니 신사는 태평양 전쟁을 잘못된 전쟁이라고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 가서 '난 전장에서 숨진 이들을 추모하러 왔다. 당시 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한국과 중국인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물론 일본인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 국민이 오해하는 게 잘못'이라고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은 안 된다. 한국과 중국 국민의 감정을 배려해야 하지만 그런 노력이 절대적으로 결여돼 있다. 주변국 국민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은 일본의 국익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쓸데없이 끼어들지 말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에 대해 '다시 군사대국을 꿈꾸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는데.

"걱정을 안 해도 된다. 현행 헌법 조문은 중학생이 봐도 '자위대는 위헌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끔 돼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장 수정 작업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의 자위대는 단 한 명의 외국인도 살해한 일이 없다. 또 단 한 명의 자위대원도 외국군으로부터 살해당하지 않았다. 이런 자위대마저 위헌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 헌법에 있다면 바꿔야 한다. 개헌론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평화헌법 걱정 안 해도 돼

-고이즈미 총리는 10개월여의 남은 임기 중 북.일 수교를 이루겠다는 의욕을 갖고 있다. 어떻게 예상하나.

"납치 문제, 핵 문제, 미사일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해 국교 정상화를 하자는 것인데 1년 새 이 세 가지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그러나 노력은 계속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단순히 노 대통령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각국 지도자들이 너무 포퓰리즘(대중 인기영합주의) 쪽으로 나아가선 안 된다고 본다. 한.중.일 3국에서 모두 내셔널리즘(민족주의)적 기운이 고양되는 분위기다. 내셔널리즘을 내세워 포퓰리즘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안 된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

고무라 전 외상은 …

주오(中央)대 법대를 나온 변호사 출신으로 80년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첫 당선된 뒤 9선을 기록하고 있다.

방위청 정무차관, 대장성 차관, 경제기획청 장관, 외상(98년 7월~99년 10월), 법무상 등을 지냈다. 2003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고이즈미 총리에게 맞서 출마했었다.

자민당 내 여섯 번째 파벌인 '고무라파'의 수장이다. 내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도 출마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일.중 우호의원연맹' 회장을 맡고 있으며, 자민당 내 중진의원 중 외교.경제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뛰어난 균형감각과 논리적 화술이 돋보인다. 소림사 권법 3단의 무술가이기도 하다.

한·중·일 관계를
둘러싼 정상 발언

▶노무현 대통령="고이즈미 총리의 생각을 아무리 선의적으로 해석하려 해도 우리 국민이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11월 18일)

▶후진타오 중국 주석="일부 세력이 A급 전범의 망령을 되살리려 하고 있다. 지도자가 사죄의 뜻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바란다."(9월 3일)

▶고이즈미 일본 총리="일.미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한.중 등 아시아 각국과 좋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11월 16일)

▶부시 미국 대통령="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중.일 정상들에게 미래를 바라보며 과거를 과거의 것으로 삼도록 요청하는 것이다."(11월 8일)

김현기 도쿄 특파원